푸른 꽃 / 최민자
어릴 적 살던 집 뒤에 양지바른 동산이 있었다. 산비탈 낙엽송 가지 끝에 봄빛이 아련해지면 산등성이 잡풀 사이에 별 사탕 모양의 푸른 꽃들이 수줍게 돋아 피어나곤 하였다. 멀어진 날의 꿈인 듯, 아득한 슬픔인 듯, 푸르게 돋아나던 꽃의 이름은 앞장이 떨어져나간 내 식물도감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푸른 별꽃’이라 불렀다. 언니들을 따라 산에 오를 때마다 덤불 아래 피어있을 푸른 별꽃만 찾아 다녔다. 내가 찾아 바라봐 주지 않으면 외롭게 피었다 슬프게 시들어버릴 것 같았다.
어른이 되고 고향을 떠나서도 나는 자주 내 푸른 별꽃이 피고 있을 어릴 적 봄 동산을 그리워하였다. 어쩌다 고향 근처에 내려가는 일이 있었지만 이미 남의 집이 되어버린 옛집의 뒤란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뒷동산에는 가 볼 수가 없었다. 어린 날은 이미 막이 내린 무대였다.
푸른 별꽃에 대한 애틋함 때문인지 나는 유별나게 푸른 꽃을 좋아한다. 해사한 제비꽃, 수굿한 꽃마리, 앙증맞은 혓바닥을 쏙 내밀고 웃는 주름잎, 노래하는 작은 새 같은 현호색. 새벽 별을 스치고 온 바람의 눈물자국처럼 작고 푸른 들꽃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가진 것을 다 놓아버리고 아득한 어린 날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골짜기 옆 벼랑을 기어올라 각시붓꽃을 꺾고, 청미래 덩굴에 손등을 긁히며 알밤을 줍던 그 시절로 돌아가 저물도록 숲 속을 헤매보고 싶어진다.
푸른 꽃에서는 슬픔의 냄새가 난다. 못다 이룬 사랑이 꽃으로 피어난 듯 애잔하고 소쇄하다. 푸른 꽃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순화된 슬픔이 청아한 물이 되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들판을 거니는 수도사의 눈길을 붙잡는 꽃이 있다면 그도 아마 푸른 꽃일 것이다. 용담, 달개비, 도라지꽃, 오랑캐꽃…. 푸른 꽃은 대부분 산과 들에 핀다.
몇 해 전 여름, 푸른 꽃이 가득 그려진 부채 하나를 선물 받았다. 오긋하고 소담한 꽃 모양이 어릴 적 내 별꽃을 생각나게 하였다. 부채살을 펼치고 살살 부치면 아직 피지 않은 청보라 꽃봉오리가 일시에 화르르 꽃잎을 열고 상큼한 향을 쏟아낼 것 같다. 세상의 복판에서 홀로 멀어진 듯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 서랍에 넣어둔 부채를 꺼내어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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