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伐草) 단상(斷想) / 이태호
선영에 도착하자 날카로운 속도 음이 능선을 타고 빠르게 전달되었습니다.
나는 소리의 반향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우들이나 아들로부터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성능 좋은 벌초기 구입 건을 놓고 작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느 그들의 제의에 진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내가 설득하고 있는 정도에 대하여 막무가내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불통 이라고 나를 몰아 세웠습니다.
그들의 물만을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빠름이 최고라고 여기는 현대에 살고는 있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입니다. 조상을 기리는 벌초 시감만큼이라도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후딱후딱 풀을 베어내고 어서어서 돌아서는 발길보다는 한 줌 한 줌 잡초를 뽑거나 베면서 그리운 부모님과 마음의 대화라도 갖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벌초기를 사용한다면 모처럼의 귀한 시간을 기계의 소음과 속도에 의하여 빼앗기고 말 테니까요.
선산에는 중조부터 시작하여 6년 전에 작고하신 어머님까지 여덟 기(基)의 조상님들께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올해는 작년과 달리 둘째 동생과 단둘이서만 조상들의 음택(陰宅)을 단장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낫은 각자 두 자루씩 준비하기로 했고요.
나머지 동생과 아들 형제를 부르지 않은 것은 그들이 벌초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올 가을에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일도 있고, 그 동안 둘째 아우와의 소원(疏遠)했던 관계도 조상님 곁에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록 그분들의 체온을 느낄 수 없지만 묵시(黙示)로나마 참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우와 나는 조상님께 예를 갖추고 잡초를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칡넝쿨을 걷어낼 때에는 줄이서 힘을 합해야만 수월했습니다.
유교적 순서로만 따진다면 증조부터 벌초를 행해야만 마땅하나 우린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산에 제일 늦게 입주하셨고 나와고 가장 늦도록 이승에서 정을 나누었던 부모님부터 벌초는 시작되었습니다. 여덟 분의 음택이 모두 단장될 즈음에는 날(낫)이 풀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꽝꽝 얼었던 생수가 바닥이 났습니다. 아우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큰형님, 지나간 일들은 모두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데 잘못입니다.” 나는 그런 아우의 태도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조상님의 음택을 올려다보면서 평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나만의 이젤(easel)을 펼쳐 놓고 나머지 삶에 대한 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림은 생각처럼 쉽게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밑그림은 물론 오래 전에 칠해진 바탕색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나 버린 시간에는 쉽게 그려지던 그림들이 왜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지는 것일까를. 그것은, 얼마나 살았느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았느냐가 우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의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의 조언이 묵시로 전달된 듯합니다.
“아들아, 이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야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할 단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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