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하네 / 이향아
남원에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이른 아침이었다.
전남 지리산 아래서 어떤 문학단체의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 남은 일정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안개 낀 새벽길을 서둘러 빠져나오면서 나는 내가 하는 짓들이 못마땅하였다. 왜 이렇게 긴박한가. 좀 느슨하게 살 수는 없는가. 누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 움직이면서도 자꾸 짜증이 났던 것이다.
버스 안에는 겨우 서너 명의 승객이 타고 있을 뿐이어서 나는 ‘이것이 확실히 7시발 서울행 고속버스인가’ 를 몇 번이나 물었다. 이렇게 한산해서야 고속버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할 수 있을까, 공연히 주제넘는 걱정도 하면서.
그러나 떠날 시간이 임박하자 어디에서 몰려들었는지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탔다. 나는 객지 사람이라서 물정을 모르고 일찍 서둘렀지만, 시간표며 버스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현지 사람들은 출발 시간에 맞게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튼 커다란 버스에 겨우 서너 명만 타고 가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남원만 해도 좁은 지역이라 그럴 것이다. 승객들은 얼기설기 친분으로 얽혀 있어서 차 안은 한동안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시끌짝했다.
나는 그날도 맨 앞자리 오른쪽의 혼자 앉는 자리를 차지하고 눈을 감았다.
“자네. 얼마만인가. 참 오랜만이시. 그동안 토옹 소식을 모르고 지냈네그려.”
“어이! 난 누구라고. 몰라보겠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서울 가는가?”
“응. 나, 빙원(병원)에 좀 가네.”
“병원에는 왜? 서울까지? 자네 어디 아픈가? 그러고 보니 얼굴이 많이 상했네.
“으응. 인자 괜찮은디.”
“어디가 나쁜가?”
“암이라네.”
그 사람은 암이라는 말을 무슨 독감이나 소화불량이라는 말보다도 더 쉽고 가볍게 그리고 명랑하게 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하였다. 암이라는 말을 들은 그 상대방 역시 예사로 들었는지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만일 놀란다면 암을 앓고 있는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봐 일부러 태연한 척하고 있을까. 나는 내 나름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의 좌석은 통로 하나를 격했을 뿐 바로 옆 자리여서 나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고 고개만 돌리면 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결국은 간으로까지 번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열에 두 칸은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섭생을 했더니 이제는 거의 치료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도 아직은 정기적으로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별다른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가, 더 확산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아물고 있는가, 병의 예후와 변화에 대처하고 있는 중이라고, 병과 싸우지 말고 잘 달래서 다스리면 병도 말을 듣는다고 그는 웃음까지 곁들여 말했다.
그는 암이 얼마나 어려운 병인지 물론 알고 있었다. 까딱하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음성에 고통스러움이나 짜증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극서은 이미 극복된 것이므로 승리자가 모험담을 발표하듯이 할 수 있을까.
“나는 서울로 전근이 되어 가네. 과장으로 승진이 도긴 했네만 걱정이 태산이야.”
“아이구 과장이라고? 아주 잘된 일이시. 축하하네, 대단허이.”
그러나 영전이 되어 가는 사람은 영전을 전혀 잘된 일로 생각힞 않는 듯 시큰둥하였고, 축하를 받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잘 되긴 뭘. 다 늙은 나이에 객지 생활 할 일이 걱정이야. 그렇다고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할 형편도 못 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처자식들 때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하숙을 하자니 그렇고 자취를 하자고 해도 그렇고 아무튼 심란하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네만. 잘된 일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방도가 생길 것이네. 그만둘 생각 말게.”
하나는 암과 투병 중이고 하나는 서울로 연정하여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이나 목소리로는 누가 암환자인지, 누가 서울로 영전을 해서 가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암환자가 영전되어 가는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였고, 영전되어 가는 사람은 친구의 암 같은 것은 귓가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덤덤하였다.
문득,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서울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릴 때 나는 그 의지의 투병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 ‘긍정하는 인생관이 암을 이기게 했어요’, ‘참 훌륭하십니다’, ‘축하해요’ 그러나 이런 말들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는 턱없이 모자랄 것 같았다.
생명을 휘협 받는 병임을 알면서도 수년 동안 끄떡없이 대처하고 있는, 저 신념과 의지와 희망으로 차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떤가? 내가 지금 도모하고 실행하고 이겨내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실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 오늘 아침까지 성가시고 걱정스럽게 머릿속을 짓누르던 그 일들이 아주 시시하고 하찮은 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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