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 박성희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차를 타면 라디오를 켜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일깨워 주는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래된 라디오를 가만히 바라본다. 책장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옛 친구의 얼굴 위로 소박한 자취방의 풍경이 겹쳐진다. 앉은뱅이책상과 커다란 쌀자루, 이불 한 채가 살림살이의 전부였던 썰렁한 방이었다. 그나마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반짝거리는 은빛 라디오였다.
열다섯 살에 접어들 무렵 아버지의 전근으로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전학도 쉽지 않던 시절이라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자취방에 남겨졌다. 아직 어리광이 몸에 배어 있던 때라 새로운 생활은 참 낯설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면 허전함과 한기가 먼저 달려들었다. 툇마루에 나앉아 사방을 둘러봐도 주인집의 방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어쩌다 주인아주머니와 마주쳐 반색이라도 할라치면 ‘연탄불 죽이지 마라, 잠 잘 때 전깃불 꼭 끄고 자라’ 는 잔소리만 속사포처럼 날아오기 일쑤였다.
따뜻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에는 일찌감치 쓸쓸함이 비집고 들어왔다. 늘 그 날이 그 날 같아서 재미가 없었다. 축 늘어져 학교와 집을 오가던 내 눈에 반짝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네거리 전파사에 새로 들어온 은빛 라디오였다. 세련되고 날렵한 모양새와 청아한 목소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어린 자취생이 탐내기에는 너무 비쌌다. 집에서 타오는 쥐꼬리 같은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가질 수 없으면 더 안달이 나는 법이다.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머릿속은 온통 라디오 생각 뿐이었다.
때마침 다른 방에서 자취하는 금옥이라는 후배가 있었다. 하루는 그 금옥이가 쌀을 살 때가 되었다고 했다. 라디오 때문에 기가 푹 죽어있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객지에서 배고픈 것만큼 서러운 것 없다’ 시며 아버지께서 내려놓고 가신 쌀자루가 생각났다. 난생처음 거래를 해볼 참이었다. 헐값에 쌀의 절반을 사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었다. 성품이 쑥떡 같아서 남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금옥이가 쭈뼛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금옥이는 원양 어업을 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씀씀이가 남달랐다. 고기가 잘 잡히던 시절이라 대처로 유학을 온 모양이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마음을 다잡은 후 쌀을 넉넉하게 퍼주었다. 금옥이도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대충 어림짐작으로 셈을 해 주었다. 우리는 공범자처럼 의미심장한 눈빛만 나눈 채 바로 헤어졌다.
돈이 생겼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라디오가 팔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람처럼 내달렸다. 다행히 라디오는 제 자리에 있었다. 꼿꼿하게 사각턱을 치켜든 오만한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돈이 부족할까봐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다행히 얼추 맞아떨어졌다. 라디오를 품에 안고 집으로 오는데 발이 땅에 닿지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라디오를 켰다. 온종일 퀴퀴한 냄새만 떠다니던 방 안이 맑고 고운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소리는 단번에 탁하고 음울하던 방 안의 기운을 싹 몰아냈다.
그 날부터 빛나던 청춘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났다. 서서히 라디오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라디오 채널 정도는 훤히 꿰뚫고, 친구들에게 프로그램의 논평까지 해줄 정도로 열렬한 애청자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늘름하게 불룩한 배를 자랑하던 쌀자루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끼니를 거르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여기는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체면 때문에 학교에서 먹는 점심을 굶을 수는 없었다. 온종일 도시락 하나로 버티면서 수돗물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두 달 만에 집에 들렀더니 어머니가 ‘피죽도 못 먹었냐. 얼굴이 영 못쓰게 되었다’ 며 걱정을 했다. 기말고사를 치느라 피곤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걸신이 들린 듯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우고는 밤새 배가 아파서 혼난 기억이 생생하다. 아직도 어머니는 그 때의 내 얼굴이 매주처럼 누렇게 뜬 이유를 모른다. 그 일 이후로 키가 자라지 않은 것이 라디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다. 어린 나이에 향수병으로 베개를 적시던 나를 어머니 대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어루만져 주던 라디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밤마다 신나는 팝송과, 감미로운 선율에 열광하며 어둠을 내몰았다. 썰렁한 자취방에서 공부 외에 별로 할 것이 없었던 내게 라디오는 세상과의 소통이었고, 짜릿한 휴식이었다.
어느새 간간이 흰 머리칼이 섞일 나이가 되었다. 험한 세파에 부초처럼 떠밀려 살면서도 소녀 시절의 순수함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청춘기에 잠자는 감성을 흔들어 깨워 준 라디오의 덕이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음악이 흐르던 그 옛날의 자취방에 머물러 있다. 라디오는 속성상 마음을 어지럽히는 현란함도 없고, 웅변가처럼 열변을 토하지도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지 오랜 지기처럼 세상살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살포시 달래준다. 그래서 나를 닮아 늙어 가고 있는 라디오를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끼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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