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 성낙향
당리동을 떠나기 사흘 전에 많은 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의 표면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제 몸을 흘려보내는 비와 달리, 눈은 내리는 대로 최초의 착지점에 차곡차곡 쌓였다. 경사 심한 가팔막에서조차 눈의 입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설층은 더욱 두툼해졌다. 그 덕에 보드랍고 푹신한 하얀 극세사 담요 한 채를 온 동네가 다 같이 덮을 수 있었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은 걸을 수 있는 것들에게만 몸을 내주었다. 순하고 연약한 것,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금방 녹고 마는 얼음가루가. 바퀴달린 힘센 것들에게만 한사코 맞섰다. 설마, 하고 길에 나온 자동차 몇 대가 낙상으로 뼈를 다친 사람처럼 눈 속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날은 우리 동네 누구도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 없었고, 마을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나는 도시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했다. 두툼한 양말과 운동화를 골라 신고 눈길을 나섰다.
익숙하던 차도와 인도, 인도와 화단의 경계가 눈 때문에 지워지고 없었다. 어떤 색깔, 어떤 형태로도 분할되지 않은 땅위의 백색 공간이 문득 당혹스러웠다. 걸음을 멈춘 채, 눈 속에 묻힌 인도를 가늠하려고 애썼다. 눈이 지워버린 사물들의 경계를 북원하려 애를 썼다. 경계에 길들여진 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진 세상이 문득 불안했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경계에 자꾸만 신경을 쓰면서 갓길 쪽으로 조심히 발을 옮겼다.
흰 눈으로 덮인 차도는 가도 가도, 텅 비어있었다. 차들이 모두 반신불수가 된 날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널따란 도로 가운데로 비칠거리며 올라가는 차 한 대 없는 대도 거동하지 못하는 차들에게까지도 그 너른 길을 양보하고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옹색하게 내려가는 자신을 문득 깨닫게 되었을 때, 울컥 분이 났다. 규칙이라는 관념의 고삐에 순응하고 사느라 경색돼버린 내 사고가 한심했다.
걸음을 옮겨 도로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에 들어와 십 년 가까이 살면서 차도 복판을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쉴 새 없이 차들이 달리는 길을 독차지하고 걸었다.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경적이 울릴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마주 오는 사람들을 위해 번번이 어깨를 오그려야 하는 인도, 그 좁은 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차도는 넓었다. 자동차들의 눈치를 살피며 도로를 횡단할 일도, 다그치듯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에 허둥거릴 일도 없어 속이 시원했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자 무슨 대단한 권력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다. 그 하루, 나에게 생각지 못한 권력을 부여해준 것은 눈이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길 복판에서 기분이 몹시 유쾌해진 나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그런 것처럼 “잘 지내시는가요?” 하고 외치고 싶었다. 하늘을 향해,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를 향해, 중1때 내 뺨따귀를 갈겨댄 못된 수학선생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마을 아래로 내려왔을 때, 차도에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들이 달리던 길을 사람들만 왁자하게 걸어가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자가용을 타고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각자의 목적지로 잘려가던 사람들이 차 밖으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다.
문득, 먼 옛날 모든 길의 중심에는 오늘처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그들에겐 길 복판으로 다니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었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자신을 다른 지역으로 교통시켜주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에, 다른 무엇에도 빚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큰길의 복판을 걸었다. 좀 더 빨리 이동하고, 좀 더 편해지기를 자동차에게 부탁하고 그것의 대가로 길을 내어준 우리들은 결국 모든 길의 주인이 된 차를 피해서 늘 헐떡거리며 길의 가장자리로, 끄트머리로 비켜서고,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당리동 전 차도를 차지하고 행군하는 사람들이 이 날만큼은 자동차로부터 길을 되찾은 시민군 같았다. 길 복판을 걸어가는 동안, 내 존재를 점점 더 충만하게 하고, 당당하게 해주는 더운 기운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에 놀랐다. 걷는 것이 신명나고 즐거웠다. 혼자 걸을 땐 멀기만 하던 길이 언제 다 걸었나 싶게 금방 끝이 났다.
마그네슘을 뿌리고 장비를 이용해 눈을 긁어냈어도 간선도로는 거의 마비상태였다. 버스정류소 전광판에는 내가 탈 작정인 화명동행 버스가 80분 뒤에 도착한다는 안내문이 떠있었다. 사흘 뒤 이삿짐을 싣고 당리동을 떠날 때도 눈은 그때까지 다 녹지 않고 길 위에 남아 있었다.
성낙향의 수필집<염장다시마>중에서
'수필세상 > 좋은수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기쁨 때문에 / 김남조 (0) | 2012.02.24 |
---|---|
[좋은수필]별 다방 커피 두 잔 / 서숙 (0) | 2012.02.23 |
[좋은수필]라디오 / 박성희 (0) | 2012.02.21 |
[좋은수필]봉창이 있는 집 / 성병조 (0) | 2012.02.20 |
[좋은수필]빙긋과 쿡 / 정진권 (0) | 2012.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