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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생각 속에 갇힌 인간 / 정임표

생각 속에 갇힌 인간 / 정임표

 

 

 

 

참 총명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으면 그 의미를 깨우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고 기막힌 문장만 암기하여 그것을 지혜인양 과시하고 다녔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삼국지를 읽으면 조조가 말했다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 내가 천하를 배신할 지언즉 천하가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하겠다." 또 이런 문장도 만납니다. "고난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영광은 같이 할 수 없다" 그는 이런 문장들에 반해서 그 밑에 줄을 쫙 그으며 암기하고는 그런 문장들을 주어 섬기며 세상사를 재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면 "네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문장은 왜 밑줄을 긋지 않는지 묻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삼국지를 쓴 작가가 트릭을 써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인간으로 상상되어지도록 조조를 묘사한 문장에 빠져서 그걸 지혜인양 암기하며 신념화 시키면 그 자신이 소설 속의 조조보다 더 나쁜 인간이 된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그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너는 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정보의 홍수시대인 글로벌 민주화 시대가 조조의 삼국시대인 줄로 착각하고 조조의 꾀로서 세상을 살아내야 된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 내게는 없는지를 돌아보며 젊은 시절에 깨달은 지혜 하나를 소개합니다.  

갑과 을, 병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셋은 모두 동일한 다섯 가지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갑은 그 지식을 각각 따로 활용하며 살아갑니다. 그가 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은 아래 산식과 같습니다. 그는 만 가지 지식을 습득한다 하더라도 단 한가지 밖에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1, 1, 1, 1, 1 = 1  

을은 이 지식을 다음과 같이 덧셈 방식으로 활용합니다.  

1 + 2 + 3 + 4 + 5 = 15 

을이 사물을 대하면서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열다섯 가지가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병은 이 지식을 아래와 같이 곱셈방식으로 연산하여 활용합니다.  

1 x 2 x 3 x 4 x 5 = 120  

병은 동일한 지식으로 일백 스무 가지의 방법을 찾아내어서 활용합니다. 갑과 을과 병은 똑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겉보기는 모두가 비슷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한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게 나타납니다. 깨우친 사람은 병이고 가장 미련한 사람은 갑입니다. 을은 평균적인 사람입니다.  

여기까지의 깨우침은 겉의 깨우침이고 그다음 단계인 속 깨우침이 있어야 제대로 된 깨우침에 이르게 됩니다. 속 깨우침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나와 자연, 나와 이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가 긍정적으로 지속. 발전해 나가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만약에 병(丙)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적인 심리를 지니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소설 속의 조조처럼 수단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결과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속 깨우침을 이뤄야 참 지혜가 발현 되는데 속 깨우침은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나는 물론이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다 잘되도록 운용하는 능력입니다.  

삼국지의 처세를 지혜인양 알고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면, 기사들의 용맹무쌍함을 기록한 책을 읽다가 기사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 생업을 내팽개치고는, 무거운 철갑옷과 투구를 쓰고 비루먹은 말을 타고, 요릿집 주인을 찾아가서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악당을 물리치려고 비틀비틀 길을 떠나는 돈키호테가 생각납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 생각 속에 갇혀버린 몽매한 우리 인간을 풍자한 것입니다.

조조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죽어나가는 조조 군사의 처지를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작가의 트릭에 속아서 독자들은 조조군사들의 처지를 생각지 못합니다.

나는 깨우침이란 말은 ‘생각의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다’라는 긴 말이 줄어서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깨우침’이 시작되면 내면에서 뜨거운 용틀임이 일어납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내면의 혁명이 시작됩니다.

깨우침은 단박에 터져야 하는데, 자기고민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쫒아 다니면 깨우침에 이르지 못합니다. 껍질이 두꺼우니 생명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삭은 달걀처럼 죽어버리고 마는 이치와 같습니다. 애석하지만 그것도 그의 운명입니다.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알려고 파고드는 근기가 있어야 깨우침에 이르는 큰 인연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봄입니다. 둥지를 나와 양지바른 초가집 토담 밑을 아장아장 걸어가는 노란 병아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둥지에는 병아리가 쓰고 있던 껍질이 흩어져 있지만 어미닭은 이제 그 껍질을 돌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 깨우침을 이루고 나면 일부러 갑과 같이 살아가는 현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존재가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때는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 다른 존재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는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