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장어는 죽지 않았다 / 정성화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와 전등 스위치를 위로 탁 젖힐 때, 그 순간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일로 집을 떠나간 뒤, 나는 그야말로 대소쿠리 안을 구르는 땅콩 한 알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다지 쓸쓸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나의 가족을 별로 사랑하지 않거나 원래 냉정한 사람, 아니면 외로워질 준비를 미리 해 온 사람, 그 셋 중에 하나일 텐데 어느 형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3종 세트에 해당하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멍한 상태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창밖의 새 한 마리가 거실 바닥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아갔다. 가슴을 할딱거리며 새는 날아갔을 테지만 지상에 남긴 흔적이란 없다. 직선으로 죽 그어지다 이내 사라져 버린 새의 그림자가 있었을 뿐, 그래서 새들은 나는 속도에 연연해 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반성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야생마처럼 질주하는 게 제대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말도 듣게 되었다. 독한 년, 누서운 것, 차돌로 깨어도 깨지지 않을 인간 등. 그러나 그런 말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날아가는 새를 올려다보며 너의 그림자가 직선 모양이니 곡선 모양이니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독하다는 것은 내 안에 독이 많아 보인다는 의미다. 독은 무서운 것이고 차돌로도 깰 수 없는 것이니 다 맞는 말이다. 다만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독이 있는지 궁금해 했을 뿐이다. 그 또한 이미 오래 전 인이다. 요즘은 무력증에 빠졌는지 그 무엇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저 잠시 다녀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처럼 밋밋하게 산다. 음식으로 치자면 ‘간’ 이 전혀 맞지 않은 상태다.
내 자신을 함심해 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벽이 허전하다. 벽 한가운데에 걸어 놓은 시계의 추가 정지해 있었다. 언제나 정확하게 좌우로 삼십 도씩 고개를 돌리던 시계추였는데……. 나는 왠지 그 추가 우리 집 주위를 순찰하는 눈초리로 느껴져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추가 흔들리지 않는 시계는 갑옷을 빼앗긴 병사처럼 보였다. 얼른 새 건전지를 꺼내 와 시계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시계추는 전보다 더 되록되록 눈알을 굴렸다. 시계를 보며 나도 그런 힘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한 년’ 이라는 소리가 새삼 그리웠다. 나의 야성은 어디로 다 사라진 걸까.
곰장어 구이집에 갔던 날을 떠올린다. 아지매는 고무장갑을 낀 채 곰장어를 잡고 있었다. 도마 한쪽 끝에 박아 놓은 대못에다 곰장어 대가리를 바로 푹 끼우더니 단번에 껍데기를 확 벗겨내었다. 한순간 발가벗겨진 곰장어는 분하다는 듯, 도마 위에다 스스로 제 몸뚱이를 몇 번 패대기쳐 댔다. 그 행세가 가소롭다는 듯, 이번에는 아지매가 곰장어의 대가리를 싹뚝 잘라 버렸다. 곰장어는 몇 번 더 요동을 쳤다. 제 몸뚱이가 댕강댕강 잘리는 순간까지도. 그러나 곰장어는 죽은 게 아니었다.
고추장 양념을 덮어쓴 곰장어는 연탄 화덕 위의 석쇠에 누워서도 마지막 힘을 다해 제 몸뚱이를 뒤틀었다. 지글지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어서 익기를 기다리는 인간들을 올려다보며 ‘지글지글’ 말하는 듯했다. 생이란 악착같이 살아 보는 정신이라고.
아지매는 참 독해 보였다. 그런데 곰장어는 더 독해 보였다. 나는 지금 그 아지매를 닮아야 할 것도 같고 또 곰장어를 닮아야 할 것도 같다. 지금 내게 필요한 야성은, 내 안에 숨겨진 어떤 가능성을 찾아 내 몸의 오지(奧地)까지 찾아가는 탐험 정신이다. 또 나의 가능성과 열정을 한데 모아 나를 해롭게 확장해 나가는 개척 정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 변용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줄기세포를 찾아내는 일이다. 탱자나무 가시 아래에서도 악착같이 여린 잎을 밀어 내는 힘, 그것이 바로 해마다 노란 탱자가 열리도록 하는 힘이지 않은가.
정신을 좀 차려 보려고 선짓국을 한 냄비 사 들고 왔다. 큰 선지 덩어리 하나를 건져서 숟가락으로 뚝뚝 잘라 먹었다. 벌겋게 선지가 배어드는 내 속을 상상하니 얼마쯤의 야성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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