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장호병
봄은 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강물은 서로 몸을 섞으며 나와 보폭을 맞추고 있다. 지상에선 아직 대궁이를 눕히지 않은 갈대 숲 속의 새들이 낯선 내방자를 경계하는지 분주하다. 뿐만 아니다. 땅 속에서도 생명을 기어 나르는 소리가 들인다. 그 활발한 움직임으로 땅은 잔뜩 부풀리어 나의 발은 카스테라를 밟고 서 있는 듯하다. 발끝에 닿은 폭신한 감촉이 나의 오체를 흔들고 있다.
한 무리의 물새들이 일제히 물 위에 앉아서는 유유히 물을 거슬러 오른다. 종이 다른 어떤 무리는 줄을 맞추어 날면서 한 놈씩 물에 발을 가볍게 담갔다가 다시 날아오르는 묘기를 펼친다. 그들은 어떻게 의사를 소통하고 있을까. 우리가 느끼기엔 단순히 신호에 지나지 않는 그 소리를 통하여 그들은 서로 짝을 찾고 사랑하고 공동생활을 영위한다.
버드나무 밑둥치에서는 마른 가지 끝까지 생명을 길어 놀리려는 ‘영차영차’ 소리가 들린다. 강을 건너와 안착하여 물기를 거부하던 민들레 홀씨도 이제는 물을 찾아 촉수를 더듬는다. 태양 아래 드러나 있는 모든 것들은 병정들처럼 일사불란하다.
서로 다른 음색 음량으로 혼신의 힘을 쏟는 소리가 나의 귀를 당긴다. 교향악으로 들린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돌 속에서 포효하는 사자를 꺼내 걸작의 조각을 탄생시켰듯이 비발디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만물이 잠 깨는 모습을 악보로 옮겼으리라 입춘 비는 깊은 잠으로부터의 마술을 걷어내는 주문과도 같다. 모두가 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인류 최초의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를 신봉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에 변함없는 근원적인 아르케를 수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그러하듯, 그는 모든 사물이 갖는 고유한 수와의 관계, 즉 비례에 따른 거리를 통하여 세상을 읽고 해석하려 했다. 거리에 가장 민감한 것은 음악이다. 그들은 현악기에서 현의 길이와 음의 비례 관계를 밝혀내기도 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밤하늘 수많은 별자리를 보면서 교향악을 느낄 수 있었나 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아름다운 거리가 있어 존재들은 빛이 나는지도 모른다. 피타고라스가 봄이 오는 이 골목에 서 있다면 새와 새들 간의 거리, 새와 수면과의 거리 유지에서 어떤 음악을 느낄 수 있을까.
거리의 조정과 파악에 미숙한 나는 세상과의 소통에 내홍 많이 앓는다. 그런 애가 노래에 자신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구나 가죽의 마음은 물론 나 자신조차도 ‘미’인지 ‘파’인지 높낮이를 구별할 수 없다. 거기에다 박자의 문제까지 오면 나의 실수나 상처는 이미 예정된 수순일 수도 있다.
생각건대 나의 목소리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웬만한 고음이나 저음의 소화에는 지장이 없다. 단지 박자를 맞출 수가 없다. 내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원인은 하드웨어적인 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소프트웨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박이나 사분의 일박, 또는 두 박자의 길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의 어려움이 노래 부르기에서는 아예 불가능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겨울이 저만치 뒷걸음치고 있다. 나의 시선 닿는 곳은 온통 볼거리이다. 봄은 그냥 봄이 아닌가 보다. 나날이 산책길에서 만나던 갈대도 어제의 갈대가 아니다. 갈대는 봄비를 머금은 채 새순을 위해 아주 부드럽게 몸을 눕힐 것이다.
봄이 와도 눈 뜨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조물주는 머잖아 몇 차례 꽃 잔치를 열 것이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이겠는가.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라 하겠는가.
물가에 놀던 새들이 물 위를 힘차게 차오른다. 그들은 한 마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종이비행기처럼 가볍게 물 위를 곡예한다. 바로 옆 동료의 날갯짓 또한 음악이리라. 높고 낮음을 볼 수 있기에 그들은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오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맑고 많은 말이 굴레로 다가온다.
세상에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게 있듯이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도 있다. 해마다 봄이 오건만, 나는 보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눈에 의존해서 간신히 세상을 보고 있다. 눈 아닌 귀로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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