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 허경자
아들아이로부터 메일이 왔다. 참 뜻밖의 일이다. 내가 먼저 안부를 전해야 답을 주는 아이였다.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겉으론 뚝뚝한 아이였다.
아들은 커 가면서 아버지와 통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면 왠지 힘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하소연 한 번 안 하는 엄마가 사실은 제일 큰 걱정의 대상이라고 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단단한 것은 부서지기 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는 푸념도 건네라고 주문을 했다. 분명 엄마는 그러지 않을 것임을 100% 장담하지만, 하소연만으로도 어깨의 짐을 상당히 덜어진다는 것이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결과라나. 하지만 현실이 변하지 않는 것도 슬픈 정보라며 익살까지 부려 댔다.
가슴이 뭉클 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는 대견함과 함께 이젠 나도 아들아이의 관심 속으로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객지 생활이 얼마나 녹록치 않았으면 사내 녀석이 곱살맞은 생각까지 했을까 하는 안쓰러움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린 시절엔 아빠보단 엄마를 무서워하던 녀석이었다. 짓궂고 산만하기가 이를 데 없어 속도 많이 태웠던 녀석이었다. 무식한 사람처럼 몽둥이를 들고 목청 높여 혼쭐을 낼라치면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엄마는 살아 나올 거라며 툴툴대며 내빼던 녀석이었다. 살집이 없는 나에게 엄마는 살찌면 안 된다며, 말랐어도 파워가 만땅인데 몸무게까지 많이 나가면 아빠와 자신은 어쩧게 사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던 그런 넉살스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강하던 엄마가 제일로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 없이 부모님 잘 만나 공부나 하는 신세지만, 힘들면 참지 말고 자신에게 털어놓으라는 것이었다. 아직은 능력도 없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아들 노릇은 해 보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들아이가 보내준 메일을 보고 또 보았다. 읽고 또 읽었다. 언제 상황이 이렇게 뒤바뀐 걸까.
딱딱한 문자들 사이로 녀석은 여전히 꼬작꼬작한 얼굴로 뛰어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불어 가는 나이에 짓눌리고 가라앉는 자신감에 위축되어 중년의 열병을 앓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기분 나빠 하면서 늙어 간다는 것에 대항했었다. 적잖게 먹은 나이만큼 변변히 이뤄 놓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못 견뎌 하며 주눅 들었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알량한 자존심에 내색 한 번 못 하던 중년의 여자.
그러나 지금 와 보니, 그런 내 인생이 볼품없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언제까지나 철부지였던 아들아이가 어느새 나의 울타리인 양 성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질 않던가.
상념에 젖다 보니 가슴이 따뜻해 졌다. 벌써 새봄이 오려는지 훈훈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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