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보기 / 최해숙
저녁 무렵 목욕탕에 들어섰다. 욕탕 속의 물은 알맞게 뜨거웠다. 비누로 대충 씻은 몸을 살며시 탕 속으로 들였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탕 속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보니 바닥에서 솟구치는 물기둥이 보였다. 좁은 구멍을 통해 분출되는 물기둥은 손바닥만 한 욕탕에 한껏 파장을 일으키며 출렁였다. ‘요즘 허리가 좋지 않은데 저기다 대고 수압 찜질이라도 해볼까.’ 실없이 중얼거리며 허리를 올렸다.
물기둥의 안마에 익숙해져 갈 즈음, 허리가 시원해지는 것 하고는 다른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물기둥 속의 기포가 내 몸을 자극했다. 느낌이 그리 강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당황스러워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지는 않을까 싶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다리를 벌렸다 모아도 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 동안 기포의 수작에 몸을 맡긴 채 딴청을 부렸다.
평소에는 숨쉬기가 힘들어 탕 속에 오래 있지 않는다. 그런 내가 원초적 본능에 끌려 꽤 오랫동안 뜨거운 물속에 있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탕 속에서 호사를 누린 시간보다 몇 배나 긴 시간 동안 바닥에 누워 숨 고르기를 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정신이 어찌됐나. 이게 뭔 짓이람. 별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가?’ 민망한 마음에 화살을 남편에게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가까운 선배와 대화 중에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잠자리에서 마누라를 한 번 안아보려고 하면 거절하는 바람에 그 문제로 자주 싸웠는데, 나이가 드니 호흡이 잘 맞아서 큰소리 낼 일이 없더라.”
“부럽다. 나는 별 본지가 까마득한데. 반년은 족히 되지 싶네.”
오랫동안 감기몸살을 떨쳐내지 못하는 내게 선배가 신통한 묘수라도 일러주듯 귀띔을 했다.
“후배가 자꾸 아픈 게 암만해도 남편하고 잠자리를 안해서 그렇지 싶다. 규칙적인 잠자리를 하게 되면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더라. 그러니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남편한테 사근사근하게 좀 잘해봐라.”
근래 들어서는 감기, 몸살도 쉬이 낫지 않는다. 기온이 내려가는 계절이면 더욱 심해진다. 하여 남보다 먼저 내복을 챙겨 입는다. 웬만한 모임 자리는 피해가며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몇 달 동안 약봉지를 싸들고 다니던 참이었다. 아내와 잠자리 자주한다는 선배도 감기로 콜록거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삐죽거렸지만, 한편으로는 귀가 솔깃했다.
부부간의 원만한 잠자리가 인간의 정신적인 면은 물론이고 신체적인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듣고 본 바가 있다.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어도 생활에 녹여내기는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이 도리질을 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머리와 가슴이라지 않는가. 남세스럽기도 하여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남편과 잠자리가 소원했던 건 사실이다.
남편은 술을 너무 좋아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늘 주변의 걱정을 듣는가 하면 식구들의 생계마저 위협했다. 잠자리에서도 술기운이 있어야 나를 잡아당겼다. 남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술에 진저리가 나 있던 나는 그를 밀쳐낼 때가 많았다. 그런 중에 사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점점 힘들어지자 남편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어쩌다 내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아예 외면하며 말문을 막아버리기 일쑤였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힘든 현실을 시원스레 바꿀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원망의 화살은 언제나 남편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에 빗장을 걸어놓고는, 찰나의 기회라도 생기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채 한 지붕 두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온 터였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목석같이 무관심을 가장하고 살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엉뚱하게도 목욕탕 물의 희롱에 놀아나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자꾸 아픈 원인이 남편을 가까이하지 않아서라니 시쳇말로 대략남감한 상황이다. 어제까지 표정 없는 얼굴에 눈길도 마주치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속없는 여자처럼 아양을 떨 수도 없고, 야한 잠옷이라도 입고 없는 꼬리 흔들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한데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던가 괜한 소리 들어서 머릿속만 복잡해졌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은 콩밭으로 슬금슬금 괭이걸음을 하고 있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집안 아주머니도 이십대 청춘에 혼자가 되고는 늘 몸이 약해 골골하셨지. 남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욕구를 배설할 수 있어야 바깥일도 잘 풀어간다는데 내가 너무 심했나? 전생의 원수가 이생의 부부로 만난다는데, 저 사람이 나를 이리 힘들게 하는 걸 보면 전생에 내가 저 사람을 무던히도 힘들게 한 모양이네.’
결혼 후 내 화두는 오로지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을 빙자해서 몸이 아프지 않을 방도를 궁리하느라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공처럼 웅크린 몸에 빈틈없이 가시를 돋우고 지내온 나날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나이 드니 호흡이 잘 맞다 하던 선배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그 말이 어디 신체적인 호흡만을 두고 만 말이었을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에 다가가다 보면 통하지 않는 일이 없을 터. 비록 전생에는 원수였을망정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려 보듬는다면 다음 생에는 은인의 인연으로 만난 수도 있을 것을.
늘 벽을 보고 잠을 자던 나는 잠결인 양하며 남편을 향해 돌아눕는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내 마음을 간파하고도 주가상승을 위해 실눈 가늘게 뜬 채 나를 살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슬며시 나를 향해 돌아눕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일 저녁상에는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 병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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