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그림 / 추선희
계절은 제 알아서 온다.
하지만 내가 부러 계절을 당기기도 한다. 언제나 그것은 제 계절 보다 반 발자국 정도 앞선다.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지만 겨울의 끝자락 쯤 봄의 입김이 앞산 너머에서 간간히 훅, 하고 밀려들 때, 누군가의 전화로 마음이 달큰해질 때, 나는 파란 그림 한 점을 꺼낸다. 거실의 중심에서 따스한 빛을 발하던 노란 산수화를 내리고 겨우내 옷장과 벽 틈에서 쉬고 있던 그것을 내건다.
그것의 제목이 파란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파란 그림이라 생각하고 파란 그림이라 부른다. 색은 나의 시선을 잡는 첫 신호이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도 가장 먼저 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에서도 대개 그러하며 소재와 선은 그 다음 차례로 느릿느릿 오곤 한다.
몇 년 전 파란 그림이 우리 집으로 왔다. 그것을 차 뒷자리에 비스듬히 세워두고 밤을 달려 집으로 오던 날 참으로 즐거웠다. 그 몇 해 전 친구의 부탁으로 일면식도 없는 한 작가의 작품평을 영역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작업실 구경을 갔는데 그곳의 그림들이 나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림을 보는 순간 눈은 빛났고 영혼은 배가 불러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난생 처음 그림을 사기 위해 적금을 들어야겠고 마음먹었다. 돈을 모아서 그 작가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사고 싶었다. 그날 본 그림 중 하나라도 날마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 집에 들이고 싶다는 탐심이 일어났다.
아무 때나 들러 작품을 구경하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다시 작업실을 찾았다. 작품들은 한 번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그는 작품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몇 안 되던 수강생도 모두 내보내고 아침부터 자정까지 작업만 한다고 하였다. 전업작가의 치열함과 더불어 고단함이 설핏 보였다. 듣고 보니 캔버스나 물감 값도 엄청 났다. 주제넘은 질문을 넙죽넙죽 잘하는 내가 이번에도 그랬다.
“후원모임 가진 작가들도 많던데 선생님도 그런 것 하나 만드는 게 어때요?”
대답이 없었다.
“제가 친구들이랑 한 번 만들어볼까요?”
“그래주면 고맙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 두 명과 한동안 푼돈을 모아 보내드렸다. 작업실 월세라도 조금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였다. 그러면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겠거니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일 년 쯤 지났을까. 어느 날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그만 도와주셔도 됩니다.”
한 수집가의 눈에 띄어 대규모 전시가 잡혔다는 것이었다.
“언제 친구분들과 한 번 오십시오. 작품 한 점씩 드리겠습니다.”
어느 저녁 들뜬 마음으로 작업실에 갔다. 그는 사십호 쯤 되는 여러 작품들을 액자들에 바꿔 끼워 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우리 집 거실에 무엇이 어울릴지를 생각하니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도 마음에 들고 저것도 좋았다. 결국 거실에 어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린 것인가, 따위는 모두 잊기로 하였다. 그 밤 그 순간 내 마음 가는 대로 고르기로 했다.
이른 봄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근시이지만 좀체 안경을 쓰지 않는다. 안 보이는 게 나은 일이 점점 많아지니 그러하다. 보고 싶은 것은 결국 모두 가까이 오므로 더욱 그렇다. 어렴풋한 눈으로 몇 마디 뒤에서 그림을 고르던 내 눈이 한 순간 반짝였다. 파란 빛으로 꽉 찬 그림 한 점이 액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시원하다. 저 안으로 들어가서 좀 쉬었으면,. 무엇을 그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상관이 없어졌다. 그 파란 색에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밤의 가로수를 내려다보고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밤은 언제나 푸른 기를 머금고 있지. 인간들이 잠드는 밤 가로수는 제 빛을 버리고 푸른빛에 잠기는 지 모르지.
그렇게 파란 그림 한 점이 집으로 왔다. 봄과 여름 내내 나는 파란 그림 앞에 왔다 갔다 한다. 거친 붓질로 파랗게 그려진 가로수의 굵은 둥치와 공작새 날개 같은 잎사귀들을 보고 있으면 밤, 가로수, 하늘, 별, 우주, 이러한 것들이 마음속으로 밀려든다. 어둠에 싸여 다만 직립으로 서 있는 파란 가로수의 심정이 된다. 고요해지거나 비워진다.
나는 비슷한 어둠에 싸여 그림을 바라본다.
파란 어둠 한 조각이 건너와 나를 물들인다.
의도 없이 우연히 가다온 것에는 그림이건 사람이건 더한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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