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가운데의 어둠 / 김남조
‘빛 가운데의 어둠’
이 말의 출처를 명백히 기억은 못하나마 누구던가 외국의 선현(先賢)이 지은 책 속의 한 구절인 성싶다.
비록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어두워도 이 어둠이 ‘빛 가운데’라는 전제에 놓여 있는 한엔 구원의 여지가 있다 할 것이다.
빛 속의 놓여진 어둠.
어둠은 어둠이라도 그건 이미 빛에 흡수될 약속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어둠 속의 빛이라고 할 때, 이 빛은 조만간의 소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생명의 산실(産室)이 격렬한 진통으로 숨 막히며, 조춘의 새 싹들이 낱낱이 질긴 수피(樹皮)를 찟어 내고 움터 나옴과도 같이, 궁극의 테두리로써는 빛을 둘러 놓고 그 광명 속에서, 빛에의 모색으로 어두운 그런 어둠이라면 능히 앞뒤의 간난(艱難)과 시련을 덮쳐 누를 수가 있으리라.
건설 도상의 신생국들이나 오늘의 환난을 내일에 열매 맺으려고 분발하는 젊은이들을 보아도 알 것이다. 우리의 뜻과 기상이야말로 빛을 행해 달려 가고 있어야 하겠고 비록 어둠 속에 떨어질 때라도 빛에 나아감을 전제로 하는, 그러한 어둠의 당사자가 아니어선 안 된다.
칠전팔기(七顚八起) 등의 말은 이미 너무나 흔해진 교훈이라 하겠거니와 이 말조차 그 밑바닥까지 내려 가 진의에 닿아 보고, 충분한 이해로 무르익혀서 양감 있는 생활 신조로 새로이 선택해 맞았으면 싶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빛에의 희구를 갖는다.
예부터 일러 온 오욕(五慾)이나 칠정(七情)이 일단은 우리의 욕구를 집약하는 기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모든 동물에 비하여 월등히 개인차를 갖도록 만들어졌으므로 각기 그 사람 됨됨이의 값어치 나름으로 욕망의 기준이나 열성의 정도도 달라진다고 말하겠다. 앞서 말한 오욕까지를 포함하여 각자 자기의 갈구에 내어 거는 비중이나 신념도 퍽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형이상(形而上)의 것도 형이하(形耳下)의 것도 있겠고, 어른다운 바람 혹은 어린애스러운 욕망 등으로 그 유형도 갈라질 듯싶다. 소아(小我)를 바쳐 대아(大我)에 이바지한 진충 순국(盡忠殉國)의 고절 지사(高節志士)나 육체의 기름으로 영혼의 불을 더 난만히 살라 올린 순교 성도들의 사적은 인류사에 있어 확실히 성인적(成人的) 풍모라고 할 것이다. 또한 빛을 바라고 그 지향에 힘 있게 내달렸던 인간의 장한 모습, 더없이 장려한 승리의 소상(塑像)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계의 고도 로마.
역사가 삭아 내린 청록의 이끼에 뒤덮히어, 모여 드는 길손들을 만 가지 감동으로 붙잡아 세우는 그 유서 깊은 유럽 옛 문화의 도시에서도 특히 양극의 성질로 맞서는 두 가지의 상징물을 들고자 한다.
그 하나는 콜로세움, 자그마치 2천 년이나 거슬러 오르는 아득한 시절에 수용 인원 5만을 자랑하던 원형 대극장이다. 갖가지 투기(鬪技)를 일삼았음은 물론 초기 기독교의 참혹, 이를 데 없는 대량 학살의 형장(刑場)이기도 했다.
피 내음에 취하는 기이한 현기증 속에 그 날의 형량(形量)이 끝나면 자리를 다투어 운집했던, 당시의 로마 시민들은 엎어지며 흩어져 가곤 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무너지고 남은 얼마간의 돌벽과 하부 구조가 그 때의 일들을 침묵으로 말할 뿐인 이 거창한 폐허 콜로세움은 바로 당대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유해(遺骸)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초대 교황 성베드로의 시신(屍身)을 벽 속에 봉안하여 세운 교황좌 성당, 성베드로 대사원인데, 백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못박혀 십자가에 숨진, 그나마 주님께의 겸양으로 거꾸로 못박혀 죽은 한낱 사형자의 그 기념관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곳은 영원한 빛을 항시 쏘아 내고 있다.
지금 위의 두 가지 사적(史蹟)을 가지고 살필 때 참으로 그 하나는 어둠 가운데의 빛이요 또 하나는 바로 빛 가운데의 어둠이었음을 분간하기에 어렵지 않다.
빛 가운데서 온전히 빛이 되려고 발돋움하는 우리, 언젠가는 기필코 빛으로 채워져야 할 것을 다짐하며 달리는 새 시대의 동지들, 하나 아직은 짙은 안개와도 같은 어둠을 짐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로 용맹과 초극(超克)을 더욱 탐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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