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 정여송
약속 날짜가 다가온다. 정해진 주제에 대한 글 한 자 써 놓은 것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난다. 무엇을 어떻게 쓸까만 생각하다가 시간이 다 갔다. 황사바람이 몰려온 것처럼 눈앞이 뿌옇고 가슴은 답답해진다. 안방에서 아이들 방으로 다시 거실로, 책상에 앉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가 베란다에서 서성이다가 복도로 나갔다가 발광을 한다. 그러한들 생각은 모여들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다.
한가한 오전 시간, 윗집도 아랫집도 옆집도 모두 빈집이다. 요즘엔 집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집안을 꾸미고 아이 키우기에 열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을 느낀 젊은 미세스들, 무엇으로든 자신을 곧추세우려 애를 쓴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수영을 배운다. 볼링을 친다. 에어로빅을 한다 하여 서둘러 나간다.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도 동네 여자들처럼 솔솔 바람을 맞고 싶은 모양이다.
마감일이 가까운 청탁원고를 쓰려고 알을 품으려던 속셈이 어그러진다. 진득하지 못한 생각들은 산란하게 흩어지면서 조바심을 일으킨다. 다시 생각들을 모으려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으니 예측 없는 빈집 신세다. 어렴풋이 뭔가가 보여 손을 휘저으면 손가락 사이에서 바람소리만 난다. 가슴 칠 노릇이다. 안달이 나는데 골똘하려니까 오히려 멍멍해진다. 결국 달걀도, 병아리도 만들지 못한 어미 닭이 되고 만다. 생각이 멈칫하면 차를 마시고 그래도 안 되면 산책을 하라 했던가. 시장 구경도 좋다는 얘길 들었다. 그렇지만 낮잠 한숨 푹 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때맞춘 듯 밖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난다. 격한 어조의 싸움소리. 얼른 창을 열고 내다본다. 아파트 옆 남새밭가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술에 취해 혼자 떠드는 소리다. 울부짖는 소리를 하다가 따져 묻는 소리를 뱉는다. 억지에 욕지거리도 마구 섞는다. 받아주고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지만 각혈하듯 가슴속 얘기를 토해낸다. 무엇을 얼마나 참아가며 쌓았기에 삭지 않고 부글부글 괴는 가슴일까. 알 수 없지만 두서없는 얘기는 무엇인가에 짓눌린 감정의 폭발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기세가 더욱 당당해진 아주머니는 여한이 없도록 내뱉는다. 혼자서 몰래 들어주자니까 갑자기 따라서 소리쳐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렇게 해서 글귀가 술술 풀어진다면 목이 터져라 소리쳐 보고 싶다.
좋은 글을 대하면 깊은 감동이 온다. 내가 글을 쓰려는 것도 그 글과 더불어 희열을 맛보아서다. 어쩌면 받은 그것을 되갚기 위해 열정을 사르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자라던 꿈이 현실로 바뀐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한 모습을 사랑한다. 아이가 공부에 열중한 모습이나, 남편이 독서에 열중한 모습을 바라보자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뿌듯하고 은은한 기쁨이 몰려온다.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야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핑크빛 엽서봉투를 받는다. 작은아이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보내 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삽화가 그려있고 곁으로 좋은 말들이 적혀 있다. 한 번도 거름이 없이 지금까지 몇 년째 보내온다. 무슨 정일까. 베픎? 한 가닥 인연 끈? 알 수 없는 끌림?…
어느 날 엽서에서다. “꽃 중에서도, 많은 꽃 중에서도 하얀 배꽃을 연상시키는 준용어머니… ” 나에 대한 찬사의 구절이다. 어느 누가 꽃에 비유함을 싫어하리. 꽃이란 꽃은 모두 성품이 신기하니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끈다. 어느 면이 배꽃을 닮아 비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묘한 흥분을 가져다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지순함이 서려 있는 배꽃. 스스로 얼마쯤 엄숙하게, 아니면 그냥 편하게 피어났을 배꽃. 꽃잎 하나, 꽃술 하나. 어떤 마음으로 피었는지 아름다운 비밀을 속으로 안고 있을 것만 같은 배꽃. 그 선생님은 내 가슴에 배나무 한 그루를 옮겨 놓았다. 과수원에 응집해 있는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집 정원에서 커가는 가용과수로 배나무를 심었다.
‘잘 가꾸리라. 나무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우리라. 글 한 편을 탈고(脫稿)할 때마다 흰 배꽃 한 송이씩 피우리라.’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그런 생각과 꿈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한, 나는 글을 쓰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안고 풀어가야 할 짐이며 행복감인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 쓰는 글인 만큼 풍성한 배꽃을 피우고 싶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내야 한 그루의 배나무에 꽃을 다 피울 수 있을런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날은 언제쯤이 될는지…
주위가 조용해진다. 소리가 약해진 걸 보니 아주머니가 술기운에서 깨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마음속이 많이 풀어졌으면 좋겠다. 잔매산 봉우리가 봄볕 아래 남새밭가에 퍼져 앉은 아주머니와 그를 보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햇살 줍는 비둘기 / 김윤희 (0) | 2012.04.10 |
---|---|
[좋은수필]빛 가운데의 어둠 / 김남조 (0) | 2012.04.09 |
[좋은수필]조팝나무 흰 꽃으로 내리는 봄 / 구활 (0) | 2012.04.07 |
[좋은수필]곰배 / 정서윤 (0) | 2012.04.06 |
[좋은수필]오 헨리에게 / 남영숙 (0) | 201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