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사과꽃 필 때 / 반숙자

사과꽃 필 때 / 반숙자 

 

 

 

달팽이처럼 숨어드는 내 서재에 오늘은 초록비가 내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송화가루가 날아와 잎맥마다 뽀얗던 사과나무 잎새들이 간밤부터 내리는 비에 씻겨져 앳된 얼굴이다. 아직은 아기손처럼 여리고 작은 잎새들이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모습은 애처롭다. 나무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보다 바람타는 나무가 한결 아름답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래쪽 가지보다 윗쪽 가지들이 더 바람을 탄다. 아래쪽 이파리가 슬렁거릴 때 상수리 이파리는 금밤 까무러 칠 듯 뒤채이다 가까스로 제자리에 선다. 창 바로 앞 의자에 앉는다. 사방이 초록빛이어선지 빗줄기도 거기 지나가는 바람결도 초록빛이다. 나는 몸살 감기약 한 병을 목 축이듯 마시고 눈을 감는다. 그 사람은 비오는 밤이면 몽환의 화필을 들었다.

밤새도록 불 켜진 아틀리에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으로 세설하는 빗소리를 들었다. 최초로 그리움을 알게 하고 떠나간 그가 20여 년의 시공을 넘어 불현듯 찾아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도 오늘은 화구를 챙겨 무한한 여백 위에 한 폭 그림을 그릴까보다. 애증의 물결이 씻겨져 내린 내 중년의 빈터에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라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심으며 초록 붓으로 초록빛 그림을 그려야 하리. 초록은 희망과 믿음이라고 했지.

엊그제는 연 사흘째 꽃비가 내렸다. 꽃피기를 오래오래 기다려오다가 지난 겨울 눈밭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눈보라 속에 꽃눈은 지그시 눈감고 있었다. 나는 경이로운 생명 앞에서 중얼거렸다. 꽃이 봄 한철 피어나는 줄 알았어요. 꽃만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했지요. 엄동 설한풍에도 꽃을 피우고 섰는 걸 나는 이제서야 보게 되네요. 문 닫고 누운 토방 안에 달빛 안고 뒹구는 꽃내음새를 겨우겨우 알았어요.

그날의 놀라움은 나를 오래도록 설레게 했다.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자연도 인간사도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만나고 헤어짐도 억겁 전생부터 인연의 고리가 이어져 있음을 내 작은 가슴으로 어찌 가늠이나 했으리. 띄엄띄엄 한두 송이 피어나던 꽃이 한줄기 내린 봄비에 생기를 얻고 일제히 합성을 지르듯 피어나기 시작했다. 발그레하니 피어 나서 하얗게 지는 꽃, 멀리서 바라보면 집은 어디로 가고 뭉게뭉게 꽃구름이 내려앉은 꽃바다 같다. 오래오래 살고 싶어진다.

꽃이 많이 왔다는 것은 사과가 많을 것이라는 예고이다. 우리는 신바람이 나서 신새벽에 일어나서 두엄을 주고 잡초를 뽑는다. 고단한 줄도 모른다. 달빛이 창을 두드린다. 바이올린 선율도 같고 클라리넷소리도 같은 저 소리, 홀린 듯 나가보니 과수원은 꽃향기도 아스라히 동천하고 있었다. 꽃잎 사이 사이 겹겹으로 스며든 달빛 속에 서 있으면 나는 착하게 살다 떠나는 거룩한 영혼의 진혼곡을 듣는 듯 싶어진다.

그것은 언젠가 본 도자기들이 마지막 불가마 속에서 천 도의 고열 속에 스스로를 달구는 그 아름다운 화염의 인종같은 것과 흡사했다. 옷깃을 여민다. 여름날 저녁 온 바다 가득 피빛 놀을 토하고 태양이 지고 있을 때 기차의 창에 기대어 몹시 흐느낀 젊은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 오랫동안의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꽃이 왁자하게 피어나기 고작 한 열흘, 꿈결 같은 며칠이 지나고나면 꽃은 다시 새 생명의 잉태를 위하여 몸을 부순다 살랑살랑 하늬 바람에도 부서지고 솨알솨알 흔드는 큰 바람에 갈가리 찢긴다. 그것은 위대한 부활의 진리이다. 꽃비가 설편처럼 무수히 흩날린다. 화사한 요정은 한도 눈물도 없이 정말 꽃답게 무너져간다.

뜰에 쌓이는 꽃잎, 꽃잎.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꽃잎, 어떤 것은 몸부림으로 뒤채다 풀 위에 눕는다. 해마다 이맘때쯤 몸살인지 맘살인지 한 번씩 호 되게 앓는 나는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욕심내고 산 탓일 게다.봄채비에 서두른 과수원 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아낙의 일, 속으로 앓는 글 쓰는 일, 세상사에 너무 많이 집착하고 덤벼든 탓일 게다.

약을 먹고 진득하니 안방에 누워 취한을 해야 빨리 낮는 줄 알지만, 지는 꽃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어머니의 뱃속처럼 그렇게 안온하고 고요로운 서재에 온종일 꽃비가 내린다. 오슬오슬 오한이 드는 얼굴을 찬 유리창에 부빈다. 연연한 꽃이 파리에 나를 아로새긴다. 백년 천년 살것 처럼 좁은 가슴 터지게 안고 싶었던 세상사, 저 꽃잎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점이고 실체는 유동(流動) 하는 것이라고 한 로마의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오늘따라 촉촉히 나를 적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뒤늦게 회오리치는 인생의 무상을 몸살을 앓으며 깨닫는 나는 철없는 여인, 이제 초록비가 그치고 나면 한동안 이 창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씨앗을 심고 가꾸고 김매고 성숙을 향해 고난한 나날을 살아야 한다. 여름, 그것은 성숙의 투쟁이다. 열매를 키우고 익히는 사과나무처럼.

내 인생의 봄은 영문 모를 때 지나가 버렸고, 여름 또한 성숙의 문을 닫으려 하고 있다. 나는 조바심치며 아직은 여름이고 싶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어느날 사랑으로 부서진 꽃잎이 크고 실한 과일로 무르익어 부활하듯 나 또한 사랑으로 부서져 메마른 가슴에 한 줄기 희망으로 피어나기를, 그것이 나의 진혼곡이었으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