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꽂이 / 김이경
오른쪽 날갯뼈가 계속 말썽이다. 오십견으로 고생하던 팔을 어렵게 치료받았는데 얼마 전 사고로 하필 그곳을 다쳤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치료는 더 더디다. 팔을 조심조심 쳐들었다 내린다. 어깨에서 ‘우둑’하는 소리가 들린다. 찔끔한다. 몇 십 년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했을 동작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심장도 바꿔다는 세상인데 팔 하나쯤 다시 바꿔다는 방법은 없을까? 어깨를 붙잡고 엉거주춤 일어나다 창가의 화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 봄, 친구 집에 갔을 때였다. 현관계단에 놓인 투박한 화분이 선녀의 날개옷을 입고 있었다. 공작선인장이었다. 황홀한 자태는 숨이 멎도록 고혹적이고 요염하기까지 했다. 가시로 무장한 선인장이 그리도 고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참으로 신묘한 주물주의 안배가 아닌가. 친구는 별로 돌보아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고운 꽃을 피운 것이 미안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투박한 화분 덕에 꽃은 더 화려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한 개를 얻어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가방 속에서 제법 두툼한 물건이 담긴 봉투가 잡혔다. ‘이게 뭐지?’ 봉투에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지난 번 친구 집에서 얻어온 공작선인장이 아닌가. 늦은 밤에 돌아온 탓이라 해도 고운 꽃이 눈에 밟혀 떠나오기도 아쉬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한참이나 지나도록 까맣게 잊고 가방에 넣고 다니다니!
선인장줄기는 마른 오이처럼 시들시들했다. 생살을 잘라낸 것도 못할 짓인데 그나마 상처가 아물도록 얼른 뿌리내릴 곳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아픔과 목마름이 오죽했으랴 생각하니 미안하고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내 건망증이 애꿎은 선인장 줄기만 말려 죽이는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치매초기야, 치매.’ 내 정신없음을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살려볼 요량으로 화분에 심었다. 화분이 넘치도록 물을 부었다. 물은 한없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래흙이니 물이 고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미안함이 가셔지기라도 할 듯 아예 샤워기를 화분에 들이대고 물을 뿌렸다. 화분 밑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물을 보면서도 내 갈증은 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났다.
선인장은 제 몸이 잘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했다. 처음처럼 시들시들하지는 않았지만 물을 주어도 생기가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속에서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혹시 뿌리가 내리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서 파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덤덤한 듯 서있던 선인장 죽기 위에 뭔가 다른 것이 돋아나고 있다.
새순이다! 어깨가 아픈 것도 잊고 화분을 들어올렸다. 죽은 듯 무심한 것만 같더니 이렇게 살아주었구나. 모친 아픔과 갈증을 견디고 살아서 새순을 틔워낸 생명의 눈부심. 그랬다. 그것은 생명의 승리였다. 나의 건망증을 호되게 나무라면허도 한편으론 너그럽게 눈감아주는 것이기도 했다.
수돗가로 갔다. 물기는 모래흙 속으로 쏙쏙 스며든다. 꿀꺽꿀꺽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마도 흙속에서는 수많은 잔뿌리가 입을 벌리고 젖을 빨듯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을 게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인지! 꺾꽂이란 생명의 신비다. 줄기 하나, 잎사귀 하나를 뚝 잘라 심어도 또 하나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만일 사람에게도 그런 신비로운 생명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선택받은 일부의 식물이나, 동물 중에도 극히 하등동물에게만 주어진 일이다. 플라나리아와 같이 몸이 잘라지면 새로운 개체가 되거나 잘린 부분이 재생하는 종이 더러 있다. 식물로 치면 꺾꽂이와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종을 보존하기 어려운 여린 생명들이거나 환경이 몹시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다. 조물주의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섭리의 한부분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심심치 않게 멸종위기에 다다른 동식물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동요에도 나올 만큼 흔하던 동식물들이 지금은 희귀종이거나 천연기념물이 되고 마침내 멸종까지 이르는 일이 허다하다. 신이 마련한 자연의 질서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무자비하게 자연을 짓밟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들 때문이리라. 지구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그들이 저지르는 만행으로 지구는 병들고 신음한다. 그것은 다른 종의 멸망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멸망에 대한 예고편임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의 질주를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멸종은 서서히 막을 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로 돋아난 줄기가 물에 흠뻑 젖었다. 다시 창가에 내다 놓는데 팔이 아프다. 순간 이 아픈 팔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새순이 돋듯 팔 하나가 돋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하다 실소한다. 만일에 사람들에게 꺾꽂이와 같은 생명력이 있었다면 지금쯤 이 지구는 어찌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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