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짐을 진 당나귀 / 안정혜
삶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이고 연극 같다. 내 삶이 한 편의 드라마라면 과연 원작은 누가 지은 것이고 시나리오는 누가 각색했을까. 왜 그 대본을 미리 받아 준비할 수 없는 것인가. 독자와 관객은 누구이며 누가 평론을 할 것이며 내 배역은 정확히 무엇일까. 누군가 대충 쓴 것인지, 나름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역작은 아닌 것 같다. 과연 이 앞이 안 보이는 각본의 주제는 무엇인가. 분명 내가 주인공인데 무슨 역할인지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감독은 배우를 잘 선택했고 주연배우인 나는 그 배역를 제대로 해낼 능력을 인정받은 것인가. 그것도 의문이다. 또한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상대역과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은 내 탓일까, 내 자유 의지대로 선택했다지만,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 때론 풀기 어려운 삶의 암호를 해독하느라 몹시 애를 태우지만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는다. 붐명 내 안에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이 잇고 내비게이터가 있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나 그것이 수수께끼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이제라도 내 존재를 캐야한다. 무슨 역할과 임무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NG투성이로 여기까지 온 이유가 꼭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고민해도 언제나 제자리. 그러다 지난해 백록 수필지에 ‘나를 찾아서’란 테마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고심하던 중 당나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찌 그리 당나귀와 비슷한 삶을 살았는지. 나는 어쩌다 녀석들을 닮았을까,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우린 동병상련의 인연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피조물은 저와 비슷한 존재를 좋아하기 마련, 바보스런 생김조차 연민의 정이 앞선다. 귀가 크다면 다리는 짧고 눈은 순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가고 코와 입은 더 익살스럽다. 고집불통이지만 인내심 하나는 미련할 정도라서 어딘지 모자란 모습이 영락없는 나 자신이다. 하나의 개체인 나는, 무수한 유전자의 내림을 물려준 윗대들의 조합이며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융합된 유일한 존재일 테지만 도무지 날 설명 할 도리가 없다. 겨우 이순이 넘어서야 자신의 그릇 됨과 소명을 눈치 챘으니, 못나도 한참 모자란다. 그것도 모르고 날개 달린 페가수스만 동경했으니….
도대체 나에게 ‘번들거림’이란 유전자가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 이 날까지 빛나 보인 적이 있나, 우아해 본 적이 있나. 그렇다고 뛰어난 재주가 있나. 왜소한 체구에 모양새까지 딱 짐꾼인 당나귀다.
여고 시절까지도 철이 안 들어 ‘평탄한 길보다는 좁고 험한 길’을 택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떠벌렸던 일이, 나이 들면서 실소를 머금게 한다. 어디 모노레일이라도 깔려있는 줄 알았단 말인가. 말이 씨가 되었나, 좁은 길 걷느라 고생 좀 한 셈이다. 그런 길은 랜드로버도 못 가고 리어카의 힘도 빌릴 수 없잖은가.
언젠가 티브이에서 방영되었던 ‘차마고도’를 주의 깊게 본 일이 있다. 해발 4000m이상의, 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길로 중국 원난성에서 티베트를 거쳐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 인도의 실크로드와 만나는 길이다. 그 길로 말이나 당나귀가 차(tea)를 싣고 무리를 지어 간다. 티베트에선 말을 사서 중국으로 데려오는 교역의 루트였다. 소금 카라반이 다니기도 하는 장장 5000km의 길이다.
당나귀나 말이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는 좁고 험준한 길이다. 잠시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냥 긑난다. 그때 비로소 당나귀의 위력을 보았다. 주인대신 등에 제 몸무게와 맞먹는 짐을 싣고 그저 묵묵히 걷는다. 말이야 명마로 태어났으면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울 수도 있지만 당나귀는 장나도, 못나도 짐이나 싣는다.
‘나를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다보니 뒤늦게 희미하나마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았지만, 이미 내 영혼은 몇 발 앞서 그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 잠재의식이 수면 아래위로 잠겼다, 떴다 했으리.
어머니가 여고 이학년 때 막내를 낳다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는 마흔셋에 중간상처를 하신 셈이다. 이십 이전의 상처(喪妻)는 복처(福妻)이고 사십 이후의 상처는 망처(亡妻)라 했듯이 아버지는 애들 여섯을 간수하지 못하고 막내 열 살 때 술병으로 무너지셨다. 아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중심을 잃으셨다. 그때 이미 내 길은 정해졌을 것이다. 맏딸인 내가 학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했으니 네 살 아래 여동생은 말해 무엇하리. 완전 혼자의 힘으로 교대를 졸업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은 그해 겨울 결혼할 처지가 되었다.
옛 동화에 ‘당나귀가 소금을 싣고 냇가를 건너다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몸부림치다 겨우 일어나 보니 짐이 가벼워졌다. 얼마 후 나귀는 솜을 잔뜩 싣고 냇물을 건너게 되었다. 이번엔 일부러 쓰러졌다. 일어나니 몇 갑절 무거워졌다.’ 제 꾀에 넘어 간 나귀의 어리석음이라니. 바로 내가 그랬다.
그간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럼 동생들을 둘로 나누어 둘씩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결혼할 남자는 그런 사정을 쾌히 책임지겠다고 나를 감동 시켰다. 묘한 것은 그 시점에 모교에서 불러준 것이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꿈꾸었으니 나는 당연히 그 길로 드렁서야 했다. 내가 페가스스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시어머님은 분가를 해주시겠다더니 결국은 시집으로 들어오라는 어명이셨고 직장까지 그만 두길 강요하셨다. 덕 좀 보려던 당나귀가 솜을 싣고 가다 물에 빠진 격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했던 당나귀는 더 허우적댔다. 맏며느리 자리까지 가중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 등에 짐은 없다. 차마고도라고 믿었던 내 길도 세월이 지나니 남들과 별 차이 없는 인생길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은, 사람에겐 누구나 능력에 걸맞는 짐이 지워진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머리에, 누구는 가슴에, 혹자는 온몸으로 ‘자심 만의 몫’을 걸머져야 된다는 사실이다. 내 등에 짐이 없어졌다고 당나귀가 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날개가 생겨 페가수스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사이 내가 돌보던 동생들도, 여동생이 맡았던 동생들도 모두 준마가 되었다.
몇 년 전 시어머님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항상 무겁고 아프던 어깨와 등이 허허롭기 짝이 없어졌다.
시간은 지나간 일을 아름답게 꾸미는 마력이 있다. 그간 나를 힘겹게 했던 그들이 모두 꽃으로 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실로 꽃짐을 지고 걸어왔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그래 그건 분명 꽃짐이었어!
남편 은퇴 후, 자연으로 돌아온 당나귀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귤나무와 매화나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늘 동경하던 곳에서 하고 싶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늦게나마 나의 당나귀가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당나귀가 고고한 매화와 어울릴 수 있을까. 그 둘은 분명 언벨런스다. 엉뚱한 당나귀는 어느 날부터 매화의 고매에 반한 것이다 아니, 어쩜 당나귀는 태어나면서부터 매화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 역시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시나리오였으리. 당나귀가 현실이었다면 매화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눈바람 속에서 봄이 보일 듯 말듯 숨바꼭질할 즈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 벌 나비의 도움 없이도 결실을 이루는 나무, 꽃도 꽃이지만 그 기품 있는 암향으로 사군자(四君子)의 품위에 올랐으리.
내가 젊은 시절 학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것은 네비게이터에 오류가 생겨 아무도 모르게 삭제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분명 생화학을 배우면서 ‘광합성’에 심취되었고 그것을 연구해서 세계의 기아(飢餓)문제에 기여하고픈 그야말로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때 하느님은 나를 학문의 길로 끌어들이지 않으시고 꼭 필요했던 당나귀의 소임을 주신 것이다.
이제 ‘꽃짐을 진 당나귀’ 4막이 오르고 있다. 여전히 풀지 못한 미스테리가 가슴을 누를 때도 있지만, 시간이 돌을 풍화시키듯 그것은 발효되고 숙성되어 인생의 자양분이 되었으리. 내게 남은 시간의 잔고는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의 메인주 시골에서 스코트 니어링과 농사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소박하게 살았던 헬렌 니어링은 여든 일곱에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썼다. 나도 그들처럼 제주에서 조화롭고 청정한 삶을 살면서, 내 삶을 소재로 ‘충만한 삶(가칭)’을 쓰고 싶다. 그래서 진정한 마음으로 당나귀 등에 빛나는 매화 꽃짐을 실어주고 싶다. 산에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이 내려갈 때 보인다 했으니 언제나 삶엔 희망이 앞장을 선다.
하얀 매화 꽃잎에 달빛이 내려와 하염없이 뒹군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화의 암향보다 더 그윽하고 아련한 어떤 향기가 건절하게도 그리우니. 도대체 그 향기의 근원이 무엇이던가. 옛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걷던 가파르고 어두운 길에서 늘 나를 이끌던 냄새다. 나는 이제 그걸 안다. 그건 바로 글의 향기, 그 목마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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