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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다북쑥 / 노혜숙

다북쑥 / 노혜숙

 

 

 

대문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뜰에 앉아 쑥을 다듬고 있습니다. 자매처럼 다정히 머리를 맞대고 앉은 모습입니다. 머리카락만 보아선 누가 웃어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 모두 백발입니다. 봇짐을 멘 것처럼 등이 불룩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 알은 체를 합니다. 할머니는 기척을 아는지 모르는지 쑥 다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둘은 잡풀 사이에서 쑥을 골라내는 중입니다. 잡풀 반, 쑥 반 그렇습니다.

“엄니가 쑥떡 생각이 낫등게뷰. 아침내 뵈드니 쑥을 뜯어 와네유.”

그제야 할머니는 천천히 고갤 들고 웃습니다. 사실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아맞히기가 어렵습니다. 세월에 파인 주름살이 희로애락의 표정마저 지운 듯싶습니다. 슬로비디오처럼 할머니의 손놀림은 마냥 느립니다. 침침한 눈으로 쑥과 풀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아서일 테지요. 해 떨어지기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달포 전, 길 건너 은행나무집 아주머니한테서 들어 안 일입니다. 할머니의 아들은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내 땅 한 뙈기 없이 남의 텃밭이나 일구는 형편인지라 감히 엄두를 못 낸 거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비슷한 나이의 여자를 중매로 만났습니다. 척추에 만곡(彎曲)이 두드러진 장애를 가진 마흔의 노처녀, 곱사등이었습니다. 마음씨 곱고 다른 질병은 없으니 되었다고, 아들은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며느릿감을 본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졌지만 아들이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까요, 둘의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며느리는 기대 이상으로 살림도 알뜰살뜰하고 노모 공양도 지극했습니다. 아들은 씨마늘 같은 딸자식까지 하나 얻자 살맛이 났습니다.

어느새 이십 년 세월이 흘러 며느리는 육십이 되었고 구순의 시어머니를 따라 백발이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단 한 번도 노모를 서운하게 해 드린 적이 없고, 손톱 밑이 뭉그러지도록 일을 하면서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 탓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웃들은 곱사등이라고 업신여겼던 생각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집안에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볼 적마다 할머니에게 며느리 칭찬을 했습니다. 처음 할머니는 손자 하난 보았으면 하는 욕심을 갖기도 했지만 손녀의 살가운 재롱을 보면서 여한이 없다 싶었습니다. 이제 갈 곳으로 가도 좋으련만, 목숨이 모진 탓에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었다고 민망해 했습니다.

며느리와 할머니도 한참 동안 자세도 안 바꾸고 쭈그려 앉아 쑥을 다듬습니다. 나는 잠깐 거들어 주었는데도 오금이 저리고 어깨가 뻐근합니다. 눈치도 없이 기지개를 켜며 아으, 소리를 내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꿀꺽 소리를 삼킵니다. 할머니는 허물어진 잇몸으로 웅얼거리듯 말합니다.

“어여 가봐 대간헌가벼. 일도 몸에 배겨야 하는겨.”

며느리는 말없이 웃고, 무안해진 나는 마당가에 휘늘어진 벚꽃나무에 한눈을 팝니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새치름합니다. 마당 가득하던 햇살은 어느덧 산 밑으로 물러가고 산비둘기 소리 구구 들려옵니다. 쑥떡을 하면 좀 얻어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려다 그만 둡니다. 한 일도 없이 너무 염치가 없어서입니다. 할머닌 그런 내 속을 어떻게 아셨는지 등 뒤에 대고 한 마디 하십니다.

“니열 떡 찌믄 먹으러 와이.”

대문을 나서다가 문지방 틈바구니에 핀 노란 민들레를 하마터면 밟을 뻔합니다. 놀라 걸음을 피하는데 며느리가 한소리 합니다.

“대문턱이라 걸치적거리긴 혀두 그리 살것다고 꽃 피는 놈을 워칙헌대유. 해필 거기다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것슈. 지들두 밻힐깨비 허구헌 날 불안시럴 거구먼유.”

들길은 온통 꽃 천지입니다.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봄까치…. 그 길 위에 꽃보다 아름다운 두 여인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서로 위하고 측은히 여기며 사는 저들이야말로 어깨를 걸고 뿌리를 뻗어가는 한 무더기 다북쑥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운은 미추의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쑥의 쌉쌀하고 담백한 맛과 뜸 들일 때 나타나는 효능 같은 은근한 멋에 있지 않을는지요. 지천으로 깔린 쑥처럼, 꽃처럼, 자연의 드넓은 가슴에 묻혀 살며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대지의 딸들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염치없지만 갑자기 두 여인네가 빚은 쑥떡이 은근슬쩍 먹고 싶어지네요. 참, 맛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