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 길 / 구활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의 망막에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 먼저 비치는 법이다.
그 길은 물굽이 산모롱이를 돌면 어디에선가 만날 것 같은 철길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 바퀴에서 자갈들이 튕기는 먼지길 신작로가 되기도 한다. 의식 속에서 달려가 보는 고향길은 고향으로 이어져 있지 않고 대체로 하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엄청난 거리감 때문에 ‘고향은 마음속에 있을 뿐 현실에는 있지 않다’ 고 자위하면서 향고향(向故鄕)에의 마음을 접어 버리고 만다.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남다르게 싫어 문득 문득 고향가는 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굴렁쇠를 굴리거나 대나무 낚싯대를 둘러메고 과수원 옆 탱자나무 사잇길을 따라 강가로 달려 나가는 소년이 되곤 한다. 떠나온 고향이지만 농촌을 고향으로 가진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거기에는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젊은 날의 잃어버린 꿈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대구(大邱)에서 영천(永川) 사이 금호강(琴湖江)과 무학산(舞鶴山)을 남매처럼 거느리고 있는 작은 촌락 하양(河陽)이다. 이곳은 태어나고 성장하여 도시로 떠날 때까지 나의 모든 부피와 무게까지 키워 준 터전인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추위 속에 칩거하던 겨울이 끝나고 훈풍이 실려오는 오월이 오면 강가에 서고 싶어 못 견디게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금호강은 늦봄인 오월부터 가을이 시작되는 구월까지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온통 천국으로 변했으니까. 오월은 강물의 물살에 온기가 전해지는 철이자 겨우내 얼음장 밑에서 굶주린 피라미들이 왕성한 입질을 시작하는 철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반짝이는 새 낚싯줄과 샛노란 깃털에 붉은 파리 머리를 단 낚시바늘 다섯 개를 구하여 대나무 낚싯대에 메다는 일로 모두가 바쁜 철이다.
학교가 파하면 지난해의 낡은 보릿짚 모자를 눌러 쓰고 낚싯대와 작은 대나무 소쿠리 하나만 달랑 들면 채비는 끝나는 것. 책보자기는 살평상 위에 팽개치고 행여 엄마에게 들킬까 뒤안에 감춰둔 낚싯대를 둘러메기가 바쁘다.
동구 밖에서 시작되는 방천 둑을 지나 과수원 사잇길을 따라 냅다 내다르면 나는 자유스런 강소년이 되고 만다. 피라미들이 놀 만한 여울을 찾아 찌 없는 낚시를 물살이 흐르는 대로 풀어 놓고 바람의 방향에 맞춰 엷은 고패질을 시작한다. 봄을 기다렸던 고기떼들은 다섯 마리의 파리가 행진을 벌이는 대열 속에 뛰어들어 어떤 놈은 배때기를 내밀고 더러는 꼬리에 낚시가 걸려 작은 소쿠리는 은빛 비늘이 퍼득이는 축복의 은바구니로 변한다. 피라미 낚시는 오후 서너시부터 한두 시간이면 족하다. 낚싯대를 휘둘러 간단없이 쳐대는 고패질로 팔둑이 무겁게 느껴지면 노을 속의 붉은 해는 실눈으로 변해 간다. 강물 속 발 밑에서 시작되는 그림자는 강가로 달려나가, 자갈밭을 지나, 방천 둑 밑의 넓은 뽕밭을 넘어, 지는 해의 속도에 따라 길게 길게 뻗어나가 일몰과 함께 사라진다. 아니 제자리로 돌아온다. 낚시를 걷고 물가에 앉아 건강한 피라미들의 배를 따야 하는 시각이다.
강가로 달려 나갈 때와는 달리 돌아오는 길은 피곤하고 지루하다. 낡은 고무신 속에 들어 있는 모래알을 연신 털어내며 내일 내야 할 숙제를 약간씩 걱정해 가며 해 저문 늦은 강에서 돌아온다. 피라미 낚시는 물살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양 사람들이 강정(江亭)이라 부르는 곳에서 무학산 벌치에 있는 집까지는 실히 십리 길이 넘는다. 이 길은 과수원 사잇길의 연속이어서 휘파람을 앞세운 황혼녘 길을 걷다가 탱자나무 가시에 얼굴을 찢기운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 고향에는 아무것도 없다. 굳이 있다면 아버지의 무덤과 호적 그리고 강변 여기저기에 건조를 위해 늘어놓은 피륙처럼 널려 있는 추억뿐이다. 그 추억의 강으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과수원 사잇길이다. 이 빛나는 오월에 과수원 사잇길을 다시 한번 걸으며 휘파람을 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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