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호롱불 / 황소지

호롱불 / 황소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응접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옛날 놋쇠 화로와 흰 사기 호롱을 보았다.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에서 옛 정취를 느껴보려는 집주인의 생각인 듯하다. 호롱을 본 순간, 보고 싶었던 옛 친구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

지난 시절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이 깔리면 동네에는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그때는 호롱불 하나를 켜놓고 그 밑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었고, 그날 일어났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고 위안을 받았다. 석유를 아끼려고 웬만한 어둠에는 불도 켜지 않았기에 저녁밥도 어둡기 전에 먹어치웠다.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섣달 그믐날이 되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게 사방에 유리를 끼운 등불을 처마 끝에 매달아 집안을 환히 밝혔다. 등불 밑에서는 이웃 친척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며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왔고, 그릇 부딧치는 소리를 내면서 음식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여름이 되어 장맛비가 쏟아지면 강물이 불어 제방이 터질 듯하다며 도롱이를 걸치고 삿갓을 쓴 남정네들이, 밤새도록 손에는 등물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분주하게 다녔다. 뒷산에서는 위험을 알리는 징소리가 드렸다. 동네 사람들은 등불의 심지를 낮추어 놓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가늠하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가을 추수가 바빠지면 농사일이 끝날 때까지 등불을 뒷마당에 높이 매달아 놓았다. 곳간에 볏섬이 쌓이는 것이 희미한 등불에 비춰 보이면 아버지는 힘겨웠던 농사일의 시름을 잊으시는 듯하였다.

장날 귀가가 늦은 어른들을 위해 아이들은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갔으며, 주말에는 막차를 타고 객지에 나간 아이들이 올 것이라는 기별이라도 있으면 부모님은 이십 리 길의 절반까지 걸어 나갔다. 밝지도 않은 호롱불이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 비록 가난한 생활이지만 그 곳은 평화와 인정이 넘쳐흘렀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여자가 공부하면(중학교에 가면)버린 자식이 된다며 조금 넉넉해도 공부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은 대학을 시켰으니 딸은 중학교라도 보내야지.’ 하면서 공부하지 않겠다는 나의 손을 이끌고, 6·25 이듬해 첫 국가시험을 보게 하려고 읍내에 데려갔다.

그렇게 시작한 객지생활에서 스위치 하나로 불이 켜지는 대낮같이 밝은 전깃불을 보았다. 그러나 도시의 인심은 전깃불처럼 밝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썰렁한 하숙방에 혼자 앉아 집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토요일 오후 막차를 타고 역에 내리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감쌌다. 이십 리 길을 산허리를 따라 혼자 걸으면 제 발걸음 소리에도 누가 뒤에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귀신이 잡아당기는 것 같아 온몸이 얼어붙어 있을 때, 산모퉁이 저쪽에서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의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호롱불을 켜놓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동경 유학에서 안경을 쓰게 된 오라버니를 닮을까 걱정이 된 어머니는 일어나 불을 끄고 나는 켜고, 어머니는 다시 끄고 나는 다시 켜고, 밤이 늦도록 모녀는 호롱불 싸움을 하였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사기 호롱은 어린 시절 내 잔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머니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부지런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었던 그 등불은 오늘까지도 내 삶의 길목에서 불을 밝혀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