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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빗방울 연가 / 염정임

빗방울 연가 / 염정임

 

 

 

장마철이 시작되어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창문으로 비가 들치며 빗방울이 유리창 위를 조롱조롱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둘이 합쳐지기도 하고, 하나로 흐르다가 다시 둘로 갈라지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의 감성도 푹 젖어 옛날 추억도 생각나고 오래 된 영화의 한 장면도 생각난다. 비는 그리움의 세계로 또한 매혹적인 사랑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빗금이 쳐지는 창문 앞에 한 젊은 여인이 서 있다. 레이스가 달린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아가씨는 애인과 도망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집 안에 가두어져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인다. 오래전에 본 영화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이다. 방대한 이야기 속에 여러 장면이 있지만 유독 이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여 무도회에서 춤을 추던 나타샤. 그녀는 바람둥이 귀족 아나토리의 유혹에 넘어가 그날 같이 도망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그 청순한 모습, 젊음의 갈등과 우수가 서려 있던 그 안절부절하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열정에 사로잡혀서 그 남자가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를 따라 떠나려 했던 순진한 여인상이었다. 꿈 많은 소녀였지만 조국의 전쟁과 시련을 통하여 그녀는 한 여인으로 성숙해간다.

쇼팽의 피아노 곡 중에는 <빗방울 전주곡>이란 음악이 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이 죠르주 상드와 함께 마욜카 섬에 가서 요양하고 있을 때였다. 쇼팽은 집에 있고 상드는 쇼팽의 약을 사러 외출을 하였다. 쏟아지는 비를 보며 그는 상드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작곡한 곡이 이 전주곡이라 한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엉뚱한 곡을 작곡한 것이다.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여, 곡 중간에는 구름과 폭풍을 묘사하는 듯한 격한 화음으로 그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쇼팽은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 머무를 때 스물여섯의 나이로 여섯 살 연상인 죠르주 상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상드는 그 당시 소설도 여러 권 썼고, 남장을 하고 다니며 여러 문인, 화가들과 연문을 뿌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 뿐이다!”라고 외치며 자유와 사랑을 구가하였다.

빗줄기가 다시 거세진다. “비는 사랑을 타고”에 나오는 진 켈리의 멋진 춤, 그는 비 내리는 유욕 거리에서 빗물을 첨벙거리며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춤을 춘다. 영화가 무성영화에서 토키로 바뀔 시대에 돈은 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파티에서 시골에서 온 케티라는 여가수를 지망하는 아릿다운 처녀를 만난다. 뉴욕의 여자들과 달리 소박하고 명랑한 그녀에게 반한 그는 그녀의 집에 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는 것이다. 그는 마음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비를 맞으며 가로등을 잡고 빙빙 돈다. 사랑의 감정으로 터질 듯한 그의 가슴을 활기찬 율동으로 온 몸으로 표현한다.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계산적이고 낭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오래전부터 시대마다 내려오는 말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연애편지는 안 쓰겠지만 문자로 인터넷으로 그들의 사랑을 전달하리라.

비오는 날은 연인들에게는 특별한 축제의 날이 아닐까? 한 개의 우산을 둘이서 받으면서 속삭일 수도 있고, 우산이 없는 여자나 남자에게 우산을 빌려 주면서 사랑이 싹틀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연속극에서 본 장면, 공원에서 두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남자는 쟈켓을 벗어 여자의 머리 위로 펼치면서, 둘은 발을 맞추어 뛰어간다. 둘 사이에 웃음이 쏟아진다. 그 드라마의 결말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비는 사랑의 메신저이며 내리꽂히는 빗줄기는 큐피드의 화살이 아닐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가 오는 날은 더 애틋하리라.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청춘,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비오는 날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마음껏 울어라. 언젠가는 잊힐 테니…라며 비는 쏟아질 뿐….

인생이란 연극에서 비는 사랑이란 주제를 가장 효과 있게 암시하는 무대장치인지도 모른다. 비는 메마른 일상의 시간을 무화시키고, 고즈넉한 마음의 안뜰을 엿보게 한다.

비오는 날, 우리는 모두 물이라는 풍요로운 질료에 감응되어 사랑이라는 마술을 꿈꾸는 것이리라.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