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 김남조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순수의 불송이, 펄럭이는 불꽃들 속에 시는 있다고 어떤 이는 말했다. 시의 주소는 불 속인가.
시인의 원고지와 시인의 주홍 램프에서 시는 태어나는가. 망사처럼 얼비치는 한 둘레의 원광이 시의 탄생을 비추는 첫 번째 조명인가.
시인은 또 누구인가.
한 작가는 말했었지. ‘시인은 패자(敗者)에게 정을 주며 참담한 투쟁과 통곡을 간절히 껴안아 주는 그 사람.’이라고. ‘쓰러진 자를 일으키고 멸시받은 자의 이마에서 오욕(汚辱)의 구정물을 지워 주는 신(神), 구원의 주님을 따라 가는 성도들과 긴밀한 혈연을 맺는 그 사람.’이라고 했다.
시의 주소는 사랑과 헌신의 구도 정신, 거기인가, 고뇌를 꽃으로 감싸 주는 곳, 시는 이 장원(莊園)의 식물인가.
크낙한 연민과 축복과 음악 안에, 자연이 일깨우는 위대한 감회 안에, 밤중의 명상과 긴 대망(待望), 그리고 기억할 만한 겸허와 축원 안에, 희부연 여명처럼 시는 깃드는가.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오늘의 소재지, 아니면 그전의 거처라도 찾자. 시를 찾아가자.
시를 춥게 하고 시를 소외시킨 비시(非詩)의 토양도 알아 내자 정신의 갖가지 공해, 기계와 약품의 홍수, 얄싹하고 예쁜 포장지, 비누거품 같은 법 조문들.
지문으로 범인을 식별하게 된 후 사람은 장갑을 끼고 살인한다. 슬로우비디오로 승패(勝敗)를 내리기도 올리기도 한다. 죽은 이를 해부하여 거짓말 탐지기로 양심을 진맥하려 한다.
광고술만도 끔찍한 위협이다. 진한 물감으로 거푸 칠하는 듯이 기억의 연습을 강요한다. 시를 내몰고 시의 의미마저도 집어 팽개친다.
응답이 요청받는 그 방식은 어떤가.
네, 라고 하란다. 어쩌다 아니오, 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중간적 논법은 일체 성가시다고 화를 낸다.
그러나 시의 주소는 여기에 있다.
지리하고 긴 회임, 쉽사리 단안을 못 내리는 사념의 발열, 심충 심리 안의 문답, 외롭게 회귀한 개성적 심상(心傷). 선명하지도 밝지도 못한 사고의 교착(膠着), 암시, 모든 잠재 의식과 꼬리가 긴 여운.
시인이 버리면 영 유실되는 것, 시인이 명명하지 않으면 결코 이름이 붙지 못하는 것, 원초의 작업 같은 혼동에의 투신과 미혹(迷惑), 그리고 눈물 나는 긴 방황.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지나친 획일화와 유니포옴의 강요에서 자유로운 곳.
그렇다 정신이 쫓겨 나서 육체와 물량의 구석에 몰릴 때, 잃고 싶지 않은 마지막 것이 탈취되고 말 때. 승복과 초탈의 갈림길에서 참담히 피 흘리는 시. 눈 어지러운 유혈을 떼밀어 내면서 청아한 흰 꽃으로 솟아 나고 싶은 시.
‘이성(理性)의 명령은 주인의 명령보다 엄중하다. 전자를 거스르면 파멸이 오지만 후자를 거스러면 전지가 된다.’고 말한 파스칼의 이성 우선의 영토, 거기에서 시는 날빛 같은 순진과 정복(淨福)을 얻어 누릴 것인가.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거짓의 언어와 침묵간의 택일. 금지된 말들의 화장터에서 생명의 언어가 불사조 되어날아 오르는 거기.
그렇지 거짓이 아니기 위해 침묵의 육중한 바위를 쪼기도 하느니. 정녕 시의 주소는 그 곳이기도 하다.
불안하면서도 분만하고 싶은 충동. 격렬하게 치받는 해산에의 그 갈망. 산욕에 풍기는 비릿한 피 내음과 이 때의 땀과 눈물.
고독 속에서 고독의 먹구름 같은 오수(午睡)를 털어내고 청신한 고독을 깨워 내는 대결의 현장 거기.
표현할 수 없는 미를 현양하는 거기.
순정과 사랑과 의용이 한 가슴에서 함성처럼 터져 나오는 그 곳.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시대의 탁류가 몰고 온 독선과 비정과 무질서 또 폐쇄. 궁핍과 이질감의 위압에서도 끝내 빼앗기지 않는 인간의 고지(高地), 정신의 고지, 시의 주소는 바로 그 곳인가.
소스라친 암각(岩角)에도 내리쏟는 천혜의 햇살이 마침내 시의 성취를 부축해 도와 주리라.
시의 주소는 어디인가.
전인적인 발언이 맑디 맑게 뿜어 나는 곳에, 작가적 양심이 곧고 은빛 나는 강철의 축(軸) 으로 박힌 곳에.
시인의 영혼이 천일 아래 해방되고 영감과 의욕에 충만한 곳에. 시인이 조국을 더욱 사랑하고 조국보다도 더 뜨겁게 전체 인류를 사랑하는 곳에. 바른 가치관 부족 없는 신앙, 창조의 열정이 용솟음치는 곳에 진실로 시는 있는가.
시인의 절망을 너머 시인의 밤의 저 켠에 희게 빛나는 시들의 거주지는 정녕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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