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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술이 고픈 날 / 류창희

술이 고픈 날 / 류창희

 

 

 

내가 만약 남자였더라면 술깨나 펐을 것이다. 그럴 소질이 다분하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에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출타하셨다가 비만 오면 앞마당 흙탕물에 드러누우시곤 했다. 술의 힘이란 이성 가지고는 못 말린다. 며느리들을 꿇어 앉혀 놓고 공자와 맹자왈 “서는 이렇고 후는 이러니라” 훈계에 밤은 깊어 가고 새벽닭이 울어야 주무셨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말수가 적었다. 맨정신으로는 잔정이 없었다. 술이 들어가야 눈이라도 마주치는 분이다. 평상에 앉아 소주 한잔 털어 넣는 순간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니, 좋아하는 기호품과 같이 간 아버지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남동생은 대학 다닐 때, 고주망태가 되어 학교 언덕인 줄 알고 오른 곳이 하필이면 청와대 뒷산에 기어들었다. “손들엇!” 소리에 놀라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삼창으로 수도 사령부 경비대원에게서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사촌 오빠는 동료 기자들과 사흘을 퍼마시고 구렁텅이에 처박혀 자동차를 들어내 폐차를 시켜도 모른 채 취해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가문의 피 속에 어느 정도 술이 섞여 흐를 법도 하다.

친정 식구들은 남의 살 한 점만 있어도 술을 마신다. 어쩌다가 삼겹살이라도 굽는 날은 잔칫날이다. 하다 못해 멸치조림이나 오이소막이 속의 새우젓 눈만 봐도 술이 고프다.

어머니는 평생 술에 질려 술 마시는 사람만 아니라면 딸을 결혼시킬 것이라 하더니, 이강주, 두견주, 문배주… 이름 다른 술들을 모아 놓고 밤잠을 핑계로 술을 마신다.

나는 어떤가. “전 술을 못해요.” “대낮부터 어떻게…” 따위로 술 앞에서 내숭을 떨어 본 적은 맹세코 없다. 간혹 술이 안 받는 날 “오늘은 마시고 싶지 않아요.”로 거절한다. 술 앞에 얼마나 당당한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낮술로 반주를 하고 오후 수업을 진행해도 술 기운으로 음률 맞춰 읽는 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남편은 신기하다. 술을 못 마신다. 술로 인한 기분 내기나 실수가 있을 턱이 없다. 늘 한결같이 맨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시댁은 제사 지내고 나서 음복(飮福)도 안 하는 집안이다. 신혼 초에 촛불까지 켜 분위기를 잡아 놓고 음주 연습을 시켜 봤다. 온통 얼굴부터 빨개져 곧 폭발할 것 같아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다. “도대체 그 쓴 걸 왜 마시느냐”며 아직도 술 마시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말 모임이 많을 때는 술 마신 아내를 위해 운전기사 노릇을 한다.

주당(酒黨) 모임이 있다. 본래는 요트(yacht)를 타는 동호인 모임이다. 휴일을 빼앗긴 아내들이 뱃놀이 방해 차원에서 뭉쳤다. 만나자마자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보고는 술을 마시러 간다. 별을 보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때론 가랑비나 눈발이 희끗거리는 날에도 바닷가 노천 카페에서 생맥주를 들이킨다. 배에서 내린 남편들이 부리나케 단속하러 온다. 이 술은 취하지 않는다. 계수나무 노와 목란나무 상앗대로 남편들을 툭툭치며 돛단배 표표히 나부끼는 분위기를 마시기 때문이다.

내 주량이라고 해 봐야 기껏 소주 한두 잔, 맥주 한 병, 양주 한 잔 정도가 고작이다. 술꾼들이 보면 가소롭게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술을 즐김에는 틀림없다. 술 구성원이 된다는 자체로 벌써 사람들에게 취한다.

나는 평소 말이 많다. 늘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편이다. 그러나 술 마실 때만은 거꾸로이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 술기운이 감돌면 말수가 적어진다. 그러다 술이 술을 마실 즈음부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한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코 술이 나를 마셔 버리는 일은 없다. 술기운을 빌어 술술 풀어놓는 이야기가 가 듣기 좋다. 허풍을 떠는 모습은 더 재미있다. 그 중에 술발 받아 열내는 모습이 제일 신난다.

문득 술이 고픈 날이 있다. 마땅한 벗 없이도 가끔은 혼자 홀짝인다. ‘風茶雨酒, 바람 부는 날은 차를 마시고, 비 오는 날은 술을 마심’라고 했던가 느닷없이 바람이 마음을 흔들어 놓은 날, 풍로에 찻주전자 올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코끝을 스치는 차향에도 스산한 바람 잦아들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면 진한 고량주 한 모금이 목젖을 뜨겁게 한다. 부슬부슬 속울음이 술에 젖는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도 한 수 읊을까. 달 없는 밤이기에 이백(李白)이 술벗으로 찾아올 만하다.

나에게 술 마시는 시간은 ‘25시’이다. 내 일상에는 없는 시간이지만 덤으로 주어지는 술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