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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그 새벽, 범종소리 / 박상혜

그 새벽, 범종소리 / 박상혜 

 

 

문학을 꿈꾸며 졸업하던 그 해, 창작도 할 겸, 일부러 강원도 두메산골로 자원 발령을 받았다. 산골 학교는 공중에 높이 달린 외로운 까치집 같았다. 60년대이고 보니, 문명의 훈김도 비켜간 오지였다. 고개를 젖혀야 보이는 하늘이 유일한 시계요, 기상청이었다. 여유로운 직장생활을 하며 창작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아주 적임지 같았다. 사방은 산으로 병풍을 둘러 계절마다 수려한 산수화 속이고, 학교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 맑아, 마을 이름을 수청리(水淸里)라 했을 만큼, 자연 속의 자연이었다. 벽계수 흘러오는 위 계곡 암자에서 울리던 범종소리는 우리들의 영혼을 손짓했지만, 풋내기 가시나 선생과 자연 꼬마들과의 아름다운 인연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학교 규모는 마을의 큰집만하고, 학급도 15세부터 24세까지 형제가 뒤섞인 혼성반으로 경영도 상황 따라 자유로웠다. 장마에 냇물이 불으면 결석이 인정되고, 마을의 애경사에는 전교가 몽땅 그 집으로 몰려 하루를 풍성하게 붐볐다. 도의 순시 장학도 교통관계로 중도 포기가 잦았다. 권태를 먹고 외로움으로 호흡하는 화전민들은 교사가 떠날까 싶어 성주처럼 모신다. 나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공주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교사나 친구를 보는 낙으로 학교를 다녔다.

혼성반이다 보니 일체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실력과 능력에 따른 엉터리 수업을 했다. 어찌 보면, 거창한 맞춤교육의 효시가 된 셈이다. 이런 수업이 버거워 우리는 적당히 노는데 더 익숙했다. 야외수업을 빙자로 사계절 산수화 속을 누비며 신선마냥 즐겼다. 나는 계곡을 건널 때는 업히는 공주가 되었고, 절벽의 꽃은 수로부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음악시간엔 음정이 존재하지 않는 제각각의 노래가 즐거움으로 두메를 넘쳤고, 체육시간엔 달리기, 씨름, 닭싸움 등……. 깨소금 재미로 아이들이 확확 크는 것 같았다.

기덕이는 우리 반의 반장이었다. 그는 18세로 1학년이라서인지 애들이 잘 따랐고, 햇병아리 교사인 나를 분신처럼 빠르며 모셨다. 그를 위시한 전교생은, 너무 순진해서 고개는 항상 벼이삭들이었지만, 선생님을 헤아리는 머리는 팽이들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책상엔 선물이 가득했다. 이슬을 머금은 도라지 꽃, 들국화, 이름 모를 산꽃들의 잼잼이 꽃다발, 대추, 옥수수, 콩엿, 산적부침….

동화 같은 이 행복은, 나의 문학의 꿈을 희석시켰다. 습작은커녕 등잔불도 켜지 못하고 고단한 베개를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진로를 위해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전근하는 날, 학교가 초상이 났다. 전교생이 두메까지 쫓아오며 우는 바람에 내 인생 눈물의 반은, 그 때 다 쏟은 것 같다. 반장 기덕이는 실신하듯 슬퍼했다. 큰 키에 낡은 모자를 쓰고, 눈물이 범벅되어, 충혈된 눈을 가누지 못하던 그 애잔한 모습은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이별 후, 몇 명을 초대하여 3박 4일의 서울 구경을 시켜 주고 행복했던 그들과의 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려 했다. 하지만, 그 여행은 오히려 그들이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의 서울구경은 천지개벽할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벅찬 새로운 세계를 본 그들은 자연스럽게 꿈을 바꾸게 되었다.

‘자갈밭을 굴러도 선생님이 계시는 서울로 나가자.’

꿈은 이렇게 야무지게 영그는데, 역으로 나는 점점 더 그들과의 교류가 귀찮아졌다. 혼인문제 등, 내 진로가 꼬이니, 청춘앓이가 버거웠다. 고민 끝에, 그들과의 추억은 아름다운 동화로 마음에 쟁이고, 살살 거리를 두며 꼬리를 사리고 마음을 정리해 버렸다.

 

지천명의 어느 날, 세단차가 미끄러지듯 교문을 들어섰다. 무심히 교무실로 내려오니,

“선생님, 저 기덕이에요. 모르시겠어요?”

“어머나! 어머나, 너 기덕이니?”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애련했던 과거의 회한이 울컥 눈물로 솟구쳤다.

그들은 선생님을 무조건 이해하고 그리워했다. 이번엔 ‘성공해서 선생님을 꼭 찾자’로 꿈은 또 한 번 바뀌었단다. 대표는 역시 기덕이었다. 무작정 상경은, 그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밑바닥 인생을 누비며, 눈물의 라면을 삼키면서 주경야독을 했다. ‘떳떳이 성공하여 선생님을 만나자’는 목표로, 그야말로 이 악물고,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공채를 통해 취업을, 성실로 기업의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꼬리 사린 선생님 찾아 삼만 리가 오늘이 되었다고 했다.

“그 때, 서울구경이 오늘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 내외는 그들 모임에 종종 초대되어 행복한 황혼을 즐겼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기덕이가 4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그 회사가 망했다. 5대 기업의 하나로 무한 도전하던 막강한 회사가 한순간에 무상에 묻히고 말았다. 더구나 기덕은 배경이 재력이 아닌 성실이었기에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가세는 기울고, 체면 때문에 다른 회사도 못가고, 몇 년을 시름시름 하더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40대 제자가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식물인간으로 누운 모습을 보노라니 참으로 마음이 저몄다. 더구나 두메산골 어린 촌놈이 상경하고 겪었을, 그 악전고투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여웠다. 선생마저 꼬리를 사렸으니 얼마나 막막한 서울이었을까.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차라리 안 만났으면, 나이 많은 내가 대신 누웠으면…. 그는 고생한 만큼만이라도 생을 즐기고 가야 하지 않을까.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 그 힘으로 고지를 점령한 기덕이 같은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끝까지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것이 삶의 질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꼭 살리고 싶었다. 내가 이행해야 할 필생의 과제 같았다. 포기선에서 며칠의 말미를 얻어냈다. 그 옛날 아름다웠던 그의 꿈을 뭉개고 꼬리를 사렸던 내가, 이번엔 떠나겠다는 그의 꼬리를 휘어잡았고 늘어졌다. 그리고 꽉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그가 나를 어렵게 찾았듯, 나도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기도를 올렸다. 그러다가 깜박했는데, 그 사이 그는 내 손에서 꼬리를 살짝 빼고 살며시 가벼렸다. 이번엔 그가 꼬리를 사렸다. 나처럼 그렇게 무정하게….

이럴 수가! 인간 한계 밖에는 신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긴, 바람 같은 인생. 우리가 메일 곳이 이디던가, 그는 아마, 이 모순 속, 비정한 인생길이 그토록이나 머물고 싶지가 않았나보다.

“그래, 그렇다면…, 내 손의 너는 갔지만, 내 안의 너는 결코 보내지 않으리!”

그가 나의 염력과 원력을 다한 간절한 기도를 타고 금방 사라진 창밖에는 신새벽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어디선가 영혼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종소리. 그 옛날, 산수화 속, 우리들 학교에 들려오던 그 범종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