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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쌀 두 되 / 정목일

쌀 두 되 / 정목일

 

 

 

팔순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려면 쉰이 넘은 나이도 잊어버리고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머니, 제가 어렸을 때 사귀었던 아무개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슬쩍 말머리를 꺼내 놓기만 하면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엔 웃음이 번져 흐른다. 세월은 흘러갔어도 그 때의 일들만은 어째서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았던 골목 안의 광경, 구멍가게의 모습들, 내 소꿉친구들, 이웃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동네의 나무들….

어릴 때의 풍경들이 다시금 되살아나 눈앞에 다가서고 있다.

어머니는 자신이 얘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나 한 것처럼 얘기꽃을 피운다. 이럴 때가 어머니로선 가장 생기에 넘치는 순간이다.

골목길 노점상인의 옷차림, 우물가 능금나무 꽃의 빛깔, 외출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가 사 오신 선물, 쌀뒤주 위 항아리에 꽂아 두었던 연꽃과 향기…. 이런 것들의 온갖 빛깔과 모양과 향기를 낱낱이 기억해 내면서 나의 손목을 잡고 옛날 추억의 나라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과거의 얘기 속에서만이 즐거움이 있다.

몸이 쭈그러들어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노인의 모습이 아닌, 가난할망정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자주 들려주시는 얘기가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못 잊는 일이 있다.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열 번은 들었을 얘기인데도, 나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시절의 궁색한 얘기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년 후쯤이었나 보다. 사라호 태풍으로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가 버리고 흉년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집에 쌀이 떨어져 굶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디선가 쌀 두 되를 얻어 온 일이 있었다.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이한필 씨라는 사람이 동사무소에 쌀 한 가마를 맡기고 끼니가 어려운 집에 두 되씩 나눠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어머니는 어떻게 들으셨을까. 동사무소로 가서 그 쌀을 얻어 오셨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만은 평생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굶주리던 자식들에게 쌀밥을 지어 먹이시던 광경…. 두 되의 구급미는 천만 냥보다 더 가치로웠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이 쌀 두 되는 자신이 겪었던 삶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절박했던 상황의 상징적 묘사로써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어떤 분의 장례식에 가는 걸 보고서 무심결에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한필 씨가 돌아가셨대요.”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놀라면서 사람들을 따라 장지까지 가셨다.

그는 부자가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지도 못한 무식쟁이에다 노동자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쌀가마를 내놓았기에 동네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한필 씨가 적선을 베푼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도 어릴 적에 사흘 동안 밥을 굶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진주 갑부로 알려졌던 ㅈ 씨는 춘궁기마다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곤 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쌀 두 되를 얻어 오셨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온 어머니는 쌀자루를 손에 쥔 채 아들을 부둥켜안고 설움이 복받쳐 오랫동안 울었다.

우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아들은 맹세했다.

'이 다음에 반드시 이 쌀을 가난한 사람에게 되돌려 주리라.'

이한필 씨는 어릴 적 어머니의 품속에서 한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팔순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드리는 일이란, 옛날 일을 물어 보는 것, 그리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까마득한 옛날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얘기 속에서 나는 어린아이로 어머니와 만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째서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려주시는 것일까.

어머니는 구차하고 고단하고 궁핍하였을 망정 쌀 두 되의 인정이 있었던 시절이 더 그리우신가 보다. 어머니의 쌀 두 되 얘기를 무심결에 듣곤 하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냥 흘려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꼭 지켜야 할 말없는 약속이 아닐까. 보이지 않게 닿아 있는 신뢰가 아닐까. 어머니와 아들이 꼭 기억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몫인 쌀 두 되가 아닐까.

어머니가 이 얘기를 들려주는 것은 어쩌면 쌀 두 되의 교훈을 일깨워 주려는 속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는 낡고 진부한 것이 아니라, 갈수록 진지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한필 씨는 약속을 지켰지만, 나는 쌀 두 되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노인 무료급식소에 매월 쌀 두 되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