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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 고임순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 고임순

 

 

 

‘이 바보 멍청이 등신’.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를 때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나 자신에게 호되게 욕을 퍼붓는다. 한번 실수를 크게 반성하지만 실수를 거듭할 때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밉기까지 한다. 항상 바쁘다고 허둥대며 실수투성이의 허점 많은 여자다.

나는 원숭이해 5월생이다. 그래서 원숭이의 습성을 닮은 것일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은 세상을 조심성 있게 살라는 교훈이어서 명심하게 된다. 수상(樹上)생활을 하는 원숭이는 채식을 위주로 과일 열매와 나무 잎사귀 등을 먹고 산다. 5월은 열매가 설익은 때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먹이를 찾아다니는 원숭이는 퍽도 바쁘다. 그래서 나도 항상 바쁜가보다.

원숭이는 잔꾀가 많고 사람 흉내를 잘 내는 동물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원숭이를 싫어했다.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재주 부리는 짓을 보면 돌아서버렸다. 왠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재주만을 믿고 날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칠까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또 원숭이는 음양오행으로 가을을 의미하는 금(金)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잘 익은 열매로 비유, 재주와 정이 많고 성실 영특하며 단장(斷腸)의 슬픈 고사처럼 자식 사랑 또한 끔찍한 동물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한편 원숭이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고독삼이 잠재의식으로 가득해서 여행을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비교적 여행을 많이 한 셈이다. 따라서 여행지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

북해도에서 한일 친선교류 전시회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 친구와 둘이서 동경에 들렀다. 예약 없이는 호텔 잡기가 어려운 동경에 가면서 나는 큰 소리 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에 투숙한 일이 있는 우에노 공원 근처 ‘법화클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약 없이도 투숙되고 할인까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것이다.

그런데 밤 10시경, 막상 그곳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불이 꺼진 건물 현관에는 수리중이라는 표적과 함께 문이 굳게 닫혀 있지 않은가. 당황한 나는 친구를 가다리게 하고 근처의 호텔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이름의 아담한 호텔들이 많아 나는 이제 살았구나 하고 건물 하나하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어 군데에서 방이 있다며 주인이 유심히 나를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하룻밤 묵으려면 12시에 오라고 했다. 숙박료는 생각보다 쌌다. 12시까지는 2시간이나 남아있어 어떻게 할까 친구와 의논하고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12시에 오라고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이 무지의 용감성,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끄러운 언행을 서슴없이 하는 것인가.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낯 뜨거운 나의 행동, 그동안 다닌 곳은 다 젊은 연인들이 쌍쌍이 가는 러브호텔이었던 것이다. 친구한테 연달은 실수를 사과하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관광호텔을 찾아가 겨우 노숙을 면했다.

그리고 귀국길에 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배탈이 나서 기운 없는 친구의 짐까지 들어주며 나는 자신 있게 앞장섰다. 우에노 역에서 나라다 비행장까지의 전철 표 두 장을 끊고 차가 왔기에 서둘러 탔다.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탄 차는 중간에서 V자로 갈라지는데 나리다의 반대 방향인 지바 행 열차였던 것이다. 아뿔싸! 순간 아찔했다.

4시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내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이곳에서 내려 택시를 타자고 서두르며 친구의 손을 잡고 짐을 들고 일어섰다. 이러한 우리를 본 승무원이 여기서 4번째 역에서 내려 공항행 전차로 갈아타는 것이 택시보다 빠르다고 일러주었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수속을 마친 후 부랴부랴 비행기의 마지막 손님으로 올라탔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아슬아슬한 곡예 탑승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며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잔등이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어도 기분은 상쾌했다.

계속 몸이 불편하여 말없는 친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연신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를 밉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