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고목 / 김시헌

고목 / 김시헌

 

 

 

고목 한 그루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작은 나무가 울타리 안에 더러 있을 뿐, 고목과 같은 큰 나무는 없었다. 우뚝 솟은 키가 먼 곳에서 보이고, 길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고목을 표준으로 설명을 했다.

봄이 되면 잎이 돋고 여름이 되면 무성한 가지가 풍만하게 움직였다. 인심이 두터운 할아버지처럼 고목은 길을 지키면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 밑에서 장기판을 벌이기도 하고, 빵을 굽는 아주머니는 고목을 의지해서 수레를 세워 놓고 장사도 했다. 조무래기들이 몰려와서 빵을 사 가지고 나무 밑에서 재롱을 부렸다. 그래도 고목은 커다란 품을 벌리고 그들을 수용해 주었다.

나는 밤이 되면 고목을 근거로 집을 찾는다. 근처에는 비슷한 골목이 많은데 3, 4년을 살면서도 때로 골목을 잘못 들어갈 때가 있다. 아침의 출근 때는 고목을 쳐다보면서 하루의 여유를 잡는다. 초조하기 쉬운 현대의 생활에서 나무를 쳐다본다는 것은 여유를 배우는 시간이 된다. 퇴근할 때는 더욱 조용하게 나무 밑을 지나온다. 고목은 무수한 잎을 달고 허공에 솟은 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그 고목에서 무심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나무의 표정은 틀림없이 무심 그것이다. 바람이 와서 흔들면 큰 저항 없이 바람의 뜻대로 움직여 주고, 새가 와서 뜻하는 말로 정한을 풀면 그것도 모조리 들어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면, 잠깐 가지를 피해 보려고 표정을 바꿀 뿐 노하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뜨거운 볕이 내리쬐면, 좀은 괴로운 듯 고개를 사리지만 아주 절망하는 무기력은 없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것을 받아 아래로 굴러 내려준다. 그러면서 정정한 높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땅을 튼튼하게 딛고 서서 영원한 자세로 하늘을 쳐다본다.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내부를 가지고 있는 고목은 오랜 수양을 쌓은 의지의 인간이다. 허약이 없고 오만이 없고 초조가 없다.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거나 감겨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고목과 정이 들었다. 후덕한 할아버지를 알고 지내듯 고목과 깊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것이 어느 하루 퇴근을 하다가 고목이 인부에 의해 끊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사람의 인부가 커다란 톱으로 서그렁서그렁 끊고 있었다. 고목은 그래도 무심한 듯 밑둥치를 맡겨놓고 그 커다란 체구를 일렁일렁 흔들고만 있었다. 참으로 안타가운 정경이었다.

이튿날이 되자 마침내 고목은 한길 바닥에 배를 내놓고 넘어져 있었다. 길을 확장하기 위해서 고목을 끊었던 것이다. 몇 사람의 인부들이 도끼를 가지고 고목을 토막으로 자르고 있었다. 팔이 끊기고 허리가 잘리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나는 한동안 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아직도 기력이 좋은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길가에 넘어져 사망한 모습과도 같았다.

또다시 하루가 지나자, 고목을 끊은 토막과 가지들은 흔적도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신 우악스럽게 생긴 불도저 한 대가 고목이 섰던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정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길을 넓히기 위한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원하고 평화롭던 고목의 여유 있는 자세는 사라지고, 딱딱한 기계의 소리가 그 위를 뒤흔들고 있었다.

문명과 자연의 대결이라고 할까. 그보다도 고향을 잃은 허전이라고 할까. 그러한 착잡한 감정으로 나는 공사의 진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목이 섰던 자리에는 지금 많은 차량이 질주한다. 버스, 택시, 자전거 등 해서 숨을 쉴 틈도 없이 속도를 낸다. 옛날 조용했던 고목을 둘러싼 분위기는 상상조차 어렵다. 소음과 긴장만이 감돌고 있다. 세월은 물줄기처럼 그 위를 흐르고 고목에의 기억은 점점 멀어져 간다.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던 고목의 성쇠는 끝장이 났다.

그리하여 앞으로 10 년, 백 년, 천 년이 지나도 또 어떤 변화가 올까. 지금은 상상도 어려운 신형 자동차가 등장할까. 아니면 또다시 그곳에 새로운 나무가 심어질까. 사람들은 앞으로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얼굴이 전부 바뀌어 진다. 지금 사람은 다 가고 새 사람이 땅 위에서 살게 된다. 그때 고목의 역사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그 증언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