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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월광에 몸푸는 하얀 나팔꽃 / 김용옥

월광에 몸푸는 하얀 나팔꽃 / 김용옥

 

 

 

 

염천 팔월의 밤은 짧으나 짧은 밤 열사흘 달빛이 참으로 깨끗합니다. 그리움에 한껏 씻긴 눈빛입니다.

더위도 익을 만큼 익으면 기를 꺾고 기울었던 달도 몸을 뒤척여 살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계미년 한여름 내 지질지질 장맛비 내려도 살아갈 만큼 햇빛은 비치었습니다. 하늘도 대지도 실컷 씻기어선지 여름밤 저 달이 유난히 말갛습니다. 월색이 고와도 나 혼자 물들어야 합니다. 마음엔들 없을까마는, 중년이 되면 ‘달이 참 밝아서…’라고 남의 밤잠을 깨우기가 낯간지러워진답니다.

축시에 잠깐 뒤척이다가, 무엇인가 흐트러진 몸매무새를 들여다보는 기척에 퍼뜩 선잠을 깹니다. 아, 명월이 완산칠봉 마루에서 말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얼른 일어나 꽃그루 앞에 우두커니 섭니다. 관음소심란의 서늘한 향(香)이 흔들립니다. 청심향(淸心香)으로 얼른 세심(洗心)합니다. 더 이상 수마(睡魔)에 덜미잡히고 싶지 않아서, 한밤의 적적함을 청풍명월에 부리기로 합니다.

놋상에 크리스털 술잔 두 개와 매화꽃 동동 흐르는 매화주를 차립니다. 어둠조차 투명하게 하는 흑청빛 하늘을 청산마냥 둘러치고 저 달을 벗삼아 마주앉습니다. 매화꽃 그렁그렁 눈물꽃마냥 띄운 잔을 들어 달을 호리니, 월색마저 매화주에 텀벙 몸을 적십니다. 한 모금 입에 물고 달빛과 눈맞추니, 매화 향이 정수리로 기어오릅니다. 달빛 적셔 마시는 매화주는 허공의 향이고 허공의 맛입니다. 어쩌면 공허의 향미이겠지요.

공허향(空虛香)을 색으로 치자면 하양입니다. 모든 색에 어울리면서도 물색 한 점 품지 않는 색입니다. 저 달빛으로도 흐트러지게 할 수 없는 새하얀 나팔꽃 송이 좀 보십시오. 창가에서, 창틀을 액자삼아 그 틀 안에 정물화로 피어 있습니다. 아직 미명 4시쯤인데, 아무도 몰래 꽃몸을 풉니다. 백설보다도 희고, 초저녁 달빛에 환하던 조롱박꽃보다도 희디 흽니다.

가장 먼저 새벽을 여는, 아침햇살을 당당히 기다리는 하얀 나팔꽃처럼 사람이 가장 깨끗하고 죄 없는 시간이 잠에서 막 깨어난 순간이라고 합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지금 무구함으로 흰 나팔꽃을 바라봅니다.

저 흰 나팔꽃 씨 다섯 톨을 손에 쥐던 날은 섬진강에 물안개 대신 가을 비가 부슬부슬 흩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비 내리는 새벽길을 따라 물을 따라 물을 찾아갑니다. 늙은 빛깔의 섬진강과 가장 먼저 가을의 꽃이 피는 벚나무 단풍길을 따라서 나도 한적한 가을길이 됩니다.

남해의 갯바람과 갯이슬을 마십니다.

갯내음나는 슬픔을 꾸역꾸역 삼킵니다.

비에 젖은 갯마을 둔덕에서 난생 처음 눈 마주친 하얀 나팔꽃. 잘 여문 꽃씨를 따서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오는 길. ‘백양촌 문학상’이 내게 와서 하얀 나팔꽃처럼 피었습니다. 가슴에도 눈썹에도 빈 손에도 꽃이 피어났습니다.

꽃씨를 꼬옥 쥐어보았습니다.

이 담엔 내 꽃밭에서 꽃 피워주겠지요…….

내 친구들 꽃밭에서 꽃 피겠지요…….

해 저물어 귀가하는 길목에서 ‘백양촌 문학상’ 수상 결정 소식을 듣고 이렇게 수상 소감을 썼습니다.

백양촌 선생님의 단아하고 맑은 모습이 하얀 나팔꽃에 오버랩됩니다. 이 나팔꽃이 피고 필 동안 백양촌 선생님의 시심(詩心)도 여기저기 이 꽃밭 저 뜨락에서 피고 피겠지요.

마악 어깨에 힘을 주고 직선으로 날아오르는 송골매처럼 생긴 나팔꽃 잎. 털이 줄기나 잎에 보송보송하여 벌레가 잘 타지 않는 나팔꽃. 시끌하게 나팔을 부는 꽃이 아니라 정결하고 단아하여 기상이 꼿꼿한 선비 같습니다. 아침마다 청렴하고 청결한 시를 읊어주는 듯합니다.

월광 아래 ‘속절없는 사랑’의 꽃 견우화와 대작합니다. 그래, 사랑이란 도대체 속절없는 것입니다. 매일 사랑 사랑 사랑해도 싫증나지 않는, 술꾼과 술의 관계 같은 사랑은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사랑은 살아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슬픈 사랑마다 죽어서 꽃으로 피었더군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이룬 사랑이라면 꽃으로나마 환생할 필요가 없는 거겠지요. 이 세상 천지 어디에나 꽃, 꽃, 꽃이 그득합니다. 사랑이란 속절없고 슬퍼서, 덧없고 아파서 그 슬픔 먹고 아픔 먹고 새로이 길러낸 영원한 사랑이 꽃인가 봅니다. 가장 아픈 사랑, 가장 슬픈 사랑의 현신, 꽃.

옛날 옛적부터 사랑은 금력과 권력으로 찢겨지고 피흘렸습니다. 그것에 맞서야 하는 애절한 사랑들. 금력과 권력은 길어야 한 시대를 누리지만, 어머나, 저 나팔꽃은 아직도 나팔꽃 사랑을 이어갑니다.

흰 공단처럼 희디흰 나팔꽃에 맑은 바람이 지나갑니다. 달빛에 홀려 밤을 꼬박 세우면서 하얀 나팔꽃이 고요히 새벽을 여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 속에서 오고가는 것들에 한숨도 오고갑니다. 한순간, 꽃처럼 피어납니다. 오래 전 나팔꽃 같던 내 사랑이.

밤마다 아내가 갇혀 있는 곳의 성벽을 기어오르던 화공의 넋이 사랑을 앓는 가슴에 찾아듭니다. 수없는 사랑들이 아직도 성벽을 기어오릅니다.

완성이 없는 사랑, 완성이 없는 삶을 결코 슬퍼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