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전하는 이야기 / 최예옥
시골길을 지나다 늠름하게 생긴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를 세우는 버릇이 생겼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적송, 은행나무―수백 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 나무, 꼿꼿이 선 채 역사의 부침(浮沈)을 온 몸에 새겼을 밑둥치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알고 있어도 말하지 않는 나무 밑에 서면 내 입이 얼마나 가벼운가, 새삼 입을 다물게 된다.
온 사방 천지를 돌아다니며 살아도 나무만큼 밑동을 키우지도 못하고, 100년도 못 사는 인생―한 길로만 가는 인생이 있고, 어지럽게 발자국을 남기는 인생이 있다. 지나간 다음 주어 모으려 하면 어떤 모습이 더 아름다울까.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해변도로를 타고 30여 분 가다 보면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고찰 ‘보경사(寶鏡寺)’가 있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하고, 진실한 것은 아름답다”는 말을 글 속에서 자주 내비치었던 수필가 한흑구 님의 문학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소 수필은 삶의 향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한흑구 님의 수필을 보면 그분은 어쩌면 나무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바다가 좋아 직장을 포항으로 정하고 그곳에서만 20년을 살다 가신 분, 보경사 입구에는 수령 700년이 넘었다는 회화나무가 있다. 작품 <노목을 우러러보며>의 소재가 되었던 나무는 아직 건강하게 푸른 잎을 반짝인다.
문인들의 생가를 복원하고, 작품을 새겨 시비(詩碑)를 세워 놓은 곳은 많지만, 수필가의 수필비는 보경사 경내 오솔길을 지나, 서운암 가는 길목의 적송이 우거진 숲 속에 있는 비가 유일하다. 새 모양의 비석에는 한흑구 님의 유명한 수필 <보리>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산행을 즐기는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땅에서 먼저 느낀다고 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철따라 물빛이 다르다고 한다. 동해의 푸른 물도 여름이면 색깔이 엷다가 겨울이면 더욱 짙어진다고 하던가. 계절따라 바뀌는 산천을 관조하며, 나무가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수필 몇 편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둘러 말하고 간 한 선비의 숨결을 이 숲에서 느낀다면 과장일까.
작가는 나무를 너무 사랑해 한 편의 수필로 엮어 내는 데 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글 한 편을 새기고, 곱씹고, 되뇌이는 데 보낸 1천 800여 날들 동안, 마음에 둔 나무 한 그루를 얼마나 가까이 두고 애타며 그리워했을까. 불과 8장 남짓한 수필 한 편을 쓰기 위해 보낸 시간을 수치로 계산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평생 글을 쓰면서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의미 없는 미문만 남발하는 후학에게 아픈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부터 꽃보다는 나무가 더 좋아 보인다. 꽃을 선물 받으면 행복하고, 봄이 되면 향내 진한 프리지아 한 묶음을 사는 데 주저하지 않던 마음이 이제는 튼실하게 밑동을 땅에 뿌리박고 선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멈추어 서서 오래 바라보곤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눈에 나무는 그저 상록수와 침엽수, 단풍과 은행 정도의 구별밖에는 못하지만 가끔 식물도감을 들여다보며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의 차이점을 알려고 하고, 벚나무가 꽃을 떨구고 이파리를 무성하게 틔우는 모습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존 경쟁 속에 남을 할퀴기도 하고 천적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동물은 그만큼 다양한 양분을 섭취하고, 자신의 섭생에 맞는 기후와 조건을 찾아 헤매지만 100년을 살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장 고등한 동물이라는 인간마저도 발달된 21세기의 과학과 의료술로도 영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무는 한번 씨앗이 떨어져 자리잡으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저 흔들리고 휘어지는 신고를 묵묵히 견디며 수십 년은 거뜬하고, 수백 년을 살아도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런 오래된 나무를 보면, 한 권의 역사책을 보는 듯하다. 나무의 나이테 하나는 어떤 이의 한 생과 맞먹는다. 더디 자라지만, 그래서 의연함을 더하는 나무가 전하는 이야기는 수다스럽지 않고 정감 어린 할머니의 음성과 같다.
요즘, 사람을 보면 곧잘 나무에 비유하곤 한다. ‘저 사람은 미끈한 은사시를 닮았네. 저이의 손은 버즘나무처럼 굴곡이 많으니 살아온 세월의 신산이 읽어지네. 저 젊은이는 봉화 춘양의 적송처럼 곧은 심성이 탐나는군.’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다 보면 내 자신 숲 속에 들어앉은 작은 싸릿대 한 줄기가 된 기분이다. 산책길에 길목을 가로막고 나서는 싸릿대 한 가지도 그냥 태어난 목숨이 있으랴. 쓰여질 곳에 제대로 쓰여진다면 그것도 한 몫을 훌륭하게 하고 생을 마감할 것을.
천년을 살고 죽어도 다시 천년을 견딘다는 주목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주어진 몫은 있는 법이거늘, 작은 교목이라도 기왕이면 동네 어귀에 느티나무가 되고 싶다. 한여름 밤, 부채질하는 무릎 맡에 잠든 어린것들의 작은 그늘이라도 되고 싶다.
5년을 고심하고 쓴 첫 마디가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이고, 마지막 마무리도 ‘나는 나무를 정말로 사랑한다’이니 진실은 에둘러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고향은 있으나 고향집이 없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유년의 뜨락에서 소꿉놀이하는 꿈을 꾸곤 한다. 감나무와 석류나무가 나란히 서 있던 마당 평상에서, 매미 소리 들으며 종이 인형의 옷을 갈아 입히며 소공녀 이야기를 각색하던 상상의 나래는 지금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었겠지만 그 나무들은 잘려져 나가 흔적도 없다.
그래서 낯선 곳을 가다가도 우람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보면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뿌리 튼실한 나무 곁에 서면 잊고 있었던 아련한 꿈들을 되살리게 된다.
나무의 생육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수종을 정확하게 식별할만한 능력도 없다. 다만 여름이면 무수한 이파리를 달고 그늘을 만들며, 겨울이면 잎을 다 떨군 빈 몸으로 하늘을 안는 그 모습을 사랑할 뿐이다. 족보와, 세세한 신상 명세를 알아야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뒷짐 진 어깨 위로 흐르는 남모르는 우수, 그 위에 떨어진 흰 머리칼 하나만으로도 수만 마디 말보다 진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몇백 킬로미터를 달려와 그늘진 숲길에 우뚝 선 노목의 허리쯤에 닿았을 한 선배 문인의 손길을 느껴보는 것―다시 쉬임 없이 밤을 도와 달려가야 한다고 해도 그 길은 떠나올 때의 조급함보다는 평상심을 찾은 그런 귀향이 될 것이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월광에 몸푸는 하얀 나팔꽃 / 김용옥 (0) | 2012.09.08 |
---|---|
[좋은수필]그해 여름의 끝 / 최원현 (0) | 2012.09.07 |
[좋은수필]삼베적삼 / 김정순 (0) | 2012.09.05 |
[좋은수필]중재송(中齋松) / 남택수 (0) | 2012.09.04 |
[좋은수필]나도 찔레 / 오창익 (0) | 201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