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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중재송(中齋松) / 남택수

중재송(中齋松) / 남택수

 

 

 

사범대학 앞뜰에 소나무 세 그루가 의젓하게 서 있다. 여름에는 이웃한 느티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같은 초록이지만, 눈보라 치는 겨울에는 독야청청한 모습에 높은 절개가 드러난다. 이 나무는 한문교육과 동문들이 돌아가신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자 10여 년 전에 심은 기념목으로 중재송이라 부른다. 나의 일과는 출근길에 중재송을 바라보면서 시작된다.

현재의 일터에서 근무한 지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러 부서에서 많은 사람을 겪었다. 초년기에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책이 높은 분이 대부분이었지만, 흐르는 세월 따라 하나둘씩 퇴직하고 그 자리에는 그 다음 사람이 올라갔다. 그리고 해마다 새로운 직원이 들어와 빈자리를 다시 메웠다. 이렁저렁 떠밀려 올라간 나는 이제 우리 부서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 되었다. 지금까지 스쳐 간 수많은 상사 가운데 두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학교에 외풍이 불어와 흔들리던 때에 기관장도 바뀌고 부서장은 더 자주 경질되었다. 기획부서에서 여섯 해 일하는 동안 실장이 열 번이나 경질되었다. 학교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규정과 제도를 관리하는 기획실장이 사흘거리 바뀌니 인수인계서 작성과 업무보고로 날밤을 새워야 했다. 새로 온 실장과 겨우 손발을 맞출만하면 또 바뀌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신경전도 벌였다.

어느 해 신학기에 실장이 새로 왔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젊고 당돌한 사람이었다. 그는 첫마디에 “업무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집무실에 스위치를, 우리 사무실에는 벨을 달고 벨소리로 직원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그때 기획과장님은 50대 중반으로 원로급이었다. 실장실과 우리 사무실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지척이었다. 벨이 길게 한 번 울리면 과장이 호출되어 갔고, 두 번 울리면 내 차례였다. 책상마다 전화기가 따로 있었지만, 그는 꼭 벨을 사용했다. 새 실장은 지금까지의 전통과 관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의 행정을 고집하였다.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길게 하였다. 회의나 행사에서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때가 다반사였다. 또 그날의 기분에 따라 결재방법도 달랐다. 그러다가 교육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는 해임되고 말았다. 그가 쫓겨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원성 높은 그 벨 선을 자른 것이었다. 그는 나의 일생에 가장 나쁜 상사로 남아 있다.

후임 실장이 왔다. 한문교육과 교수였다. 결재판을 들고 실장실에 들어가 인사드리니 신임실장이 벌떡 일어나 맞절을 하였다. 서류를 살펴보고 도장을 찍어 주기에 다시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니 실장님도 일어나 따라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는가 하여 문을 열어 드리고 뒤로 물러서니 계장인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펴가입시더” 라고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또 의논할 일이나 물어볼 내용이 있으면 사무실로 찾아와서 “과장님 좀 뵈입시다.” 하고는 과장을 모시고 가서 말씀을 나누었다. 실장실에 갈 때마다 나이도 많고 직책도 높은 어른이 번번이 일어나니 황송하여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특히 전임 실장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실장님을 찾아뵙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아랫사람으로서 너무 부담스러우니 그냥 앉아 계시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실장님은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뿐이니 괘념하지 마시라.”고 했다. 올곧은 선비를 1년 남짓 상사로 모시면서 강의실에서 배우지 못한 귀한 가르침을 받았다.

해가 거듭되어 나의 직위도 조금씩 올라 수하에 직원 몇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 많은 사람이 언제나 하나씩 꼭 끼어 있었다. 술을 즐겨 지각이 잦은 남자, 직장에 불만이 많은 노동조합의 핵심일꾼, 부채가 많아 파산 직전인 사람,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진 이혼남. 이런 직원들은 인간관계도 원만하지 않을뿐더러 업무에도 소홀하기에 십상이었다. 초보 과장이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일단 그들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과(課)의 회계를 맡겼다. 많지는 않지만, 공금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으니 매일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금관리는 시재가 정확하여야 하니 자주 확인하고 영수증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므로 맡은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돈은 함부로 쓰더라도 공금에 손을 대면 공금횡령의 큰 죄를 짓게 되니 두려운 마음으로 일하였다. 더욱 귀한 것은 과장이 자기를 신뢰하고 가장 중요한 재정을 맡기니 그들도 과장을 믿고 열심히 일했다.

남자는 단순하다. 직장에서 남자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상사가 자신을 신뢰하고 칭찬해 주면 그 남자는 죽을힘을 다하여 충성하게 된다. 한 번 맺어진 신뢰관계는 수십 년을 이어가고 다소 못마땅한 일이 있더라도 덮어주고 참아주게 마련이다.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하니 그 기쁨은 배가되고 슬픈 일은 그 슬픔을 같이 나누니 반으로 줄어든다. 오래 전 그 선비 실장에게 배운 경험이 살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오후 산책길에 그늘나무 아래 잠시 머물렀다. 세 그루의 소나무는 옮긴 자리에 깊이 뿌리를 박고 싱싱한 솔잎과 가지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참스승의 본을 보여 주셨던 실장님을 뵙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잠시 행정을 맡았으나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말이나 이론으로서 아니라 당신에게서 우러나는 인격이 우둔한 나를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분은 유독 술을 즐겼다. 스스로 자신을 술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부서 회식이 끝나면 단골 술집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서 사무실에서는 듣지 못한 재미난 말씀을 하셨다. 자신은 인물이 썩 잘 생긴 편은 아니나 아주 못생기지도 않았으며, 학식이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전혀 못 배운 것도 아니며, 일생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기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가운데 中 자를 가장 좋아하며, 또 사는 동네가 중동(中洞)인지라 지인들이 그의 호(號)를 중재(中齋)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기실 그분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말씀에 조리가 있었으며 특히 우리말의 고저장단을 정확하게 구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선대의 한학을 전수받아 쉼 없이 연구한 뛰어난 한학자였다. 방학이 되어도 못다 한 교재에 대한 강의를 계속하였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연구실로 불러 배운 내용의 암송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계신 언저리에는 언제나 따스한 봄기운이 감돌아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존경을 받았다.

이제 그분이 저 세상으로 가신 지 20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뭍 제자들이 해마다 스승의 날에 묘소를 참배하였고, 올해에는 그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 스승의 산소에 묘비를 세운다고 한다. 그분을 직접 뵙지 못한 이들도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스승의 높고 빼어난 인격과 생전의 제자 사랑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그분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이는 당시에 받은 느낌이 매우 크고 깊었기 때문이리라. 소나기가 지나간 해거름에 중재송(中齋松)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건들바람을 쐬며 그분의 모습과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