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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잘사는 게 뭐지? / 이동민

잘사는 게 뭐지? / 이동민

 

 

 

요즘에는 백수답게 낮 시간에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의사 선생님이 나와서 건강에 관한 강의를 하는 프로와 자주 만난다. 요즘의 의사 선생님은 입담이 구수하여 이야기가 재미있다.

“선생님, 치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하는 것입니다.”

명답이 아닌가. 소아과 의사가 하는 일은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혼자서도 잘살아 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이도, 어른도, 혼자도, 해석에 혼란이 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잘살게’라는 말은 답을 구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라고 하면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부딪친다. 어렵게 표현한 것보다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라는 말은 형이하학적으로 대답한 명답이 아닌가.

금년에는 대학 동기회의 총무를 맡았다. 졸업한 지 30년 6개월이 되었다.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후반기 동기회 운영에 관하여 임원진이 모여서 이야기나 나누잔다. 임원진이래야 겨우 세 명이다. 동기회 운영은 핑계이고 술이나 한잔하자는 속셈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막걸리 맛이 소문난 집으로 된장우거지국에 비빔밥이 일품이라고 하였다. 양식집보다 이런 집이 더 좋지. 난 이런 집이 더 좋더라. 전화기를 통하여 그가 전한 말이었다.

회장은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서 전문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모교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미국 동기들의 근황이 되었다.

미국 동기에 관한 나의 기억은 거의 20년쯤 전에 미국에 정착한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가 전부이다. 마치 동화책의 성곽 같은 집에 살고 있던 모습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기의 부부 60여 명이 모여서 가진 파티장은 지하였는데 카페도 노래방도 당구장도 있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 그날 저녁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미국의 동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다닐 때 서로가 외로워서 가까이 지냈던 친구였다. 나는 전화를 받자 대뜸 “우와, 너네들 미국에 와서 성공했더구나. 집이 어마어마하구나.”라며 부러워하였다.

그때 전화선을 타고 온 그 친구의 차분한 목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 속을 싸아하게 해준다.

“그렇게 보이나. 우리가 이 정도라도 자리를 잡기 위해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를거야.”

그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때는 그의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흘려들었기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몰랐다. 그냥 부럽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나는 회장더러 이렇게 물어 보았다.

“너는 미국에 머물지 않고 왜 한국에 나왔어?”

“난 조금도 후회 안 해. 여기 생활이 얼마나 좋은데. 저녁마다 친구들 만날 수 있지, 눈치를 보면서 부대끼지 않지, 가슴속에 품은 말을 주저 없이 털어낼 수 있지.”

“그곳은 안 그래.”

“사람 사는 곳이 별 곳이야 있겠냐마는, 우리와 문화가 다르니까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어. 어쨌거나 여기가 좋아.”

“그래도 무지하게 잘사는 것 같던데.”

“그럴 거야. 그래도 여기가 더 좋아.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한번도 후회한 일은 없어. 오늘 저녁처럼 이렇게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행복이 아니냐? 이게 잘사는 게 아니냐?”

맞다. 이게 잘사는 게 맞다. 나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생활이 외롭다던 그 친구는 지난겨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한국에 살고 있는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형님도 알다시피 형은 목 디스크와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었잖습니까? 아마도 약을 과용하신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라면…. 나는 순간 가슴이 멍해 왔다. 학교를 다닐 때 미국에 가서 전문의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우리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미국으로 갔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장이 뉴욕에 들렀을 때 그의 집에 초청을 받았단다. 어마어마한 집의 아래층에 노래방이 있어서 노래를 하였단다. 그 친구는 한국 노래를 너무 많이 알고 있더라고 하였다. 한국의 노래를.

그가 한국에 나왔을 때 식사를 함께한 일이 있었다. 아들은 그리도 어렵다는 의과대학을 나와서 미국 의사가 되었고, 며느리는 독일계 2세로서 역시 의사라고 하였다. 딸은 뉴욕에서 변호사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또 그 친구가 부러웠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자신의 생활은 접어버리고 사는 사람도 많다던데, 자식들의 교육도 잘 시켰고, 돈도 벌었고, 도무지 부족한 점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우울증 때문에….”라며 울먹거리던 동생의 목소리는 나를 깊은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잘사는 게 뭔데, 하는 풀 수 없는 화두를 나에게 남겨 주었다.

바깥에는 장맛비가 주룩거리고 있었다. 마음씨 좋은 식당 사장은 괜찮다는 우리에게 억지로 우산을 내어 주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빗속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 한 잔 더 하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실컷 이야기나 나누자.”

“그럼. 이게 잘사는 거야. 한 잔 더 하자.”

우리는 비틀거리면서 풀 하우스에 들렀다. 아마도 생맥주를 마시면서 횡설수설하였을 것이다. 삶이 뭐냐, 잘사는 게 뭐냐 하면서, 논리에 맞지도 않는 말을 제멋에 겨워서 쏟아 내었을 것이다.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쥐뿔도 모르면서 마치 내가 잘살고 있는 듯이 호기를 부렸을 것이다.

이튿날 나는 속이 쓰려서 종일토록 방에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