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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하수도 / 배형호

하수도 / 배형호

 

    

 

 

선생님 어서 오세요. 제자분들도 어서 오세요.” 평소와 달리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반갑게 맞는다. 우리는 선생님과 제자란 소리에 껄껄 웃으며 오늘 뭐 좋은 일 있소?” 묻는다. 물수건을 내오던 아주머니는 선생님 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다고 너스레를 떤다. 옆에 있던 주방장은 답답해 못 살겠다고 속을 시원하게 뚫어 달라고 거들었다.

그 집은 전부터 하수도 배관이 잘못되어 배수에 문제가 많았다. 주방에서부터 건물 밖 하수구까지 길게 이어진 배관은 굽이도는 자리마다 청소를 할 수 있도록 맨홀을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한 곳도 맨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잘라낸 파이프 속에는 허연 기름 덩어리가 부질없는 욕심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그 동안 몇 번 뚫었지만 며칠 못가서 또 뚫었다고 했다.

주인은 내일 당장이라도 공사를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인테리어업자를 원망했다. 업자들은 더러 외관상의 멋과 공사비 절감을 위해 각 분야의 의견을 무시하는 수가 많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괜찮겠지만 오래 가지 못해 하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모든 일이 정도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되듯 사용자도 기본지식과 원리를 알아야 한다. 원망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씁쓸한 느낌이 든다.

이제는 분야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가가 일하고 사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어깨 너머로 배워서는 기술적인 원리를 알 수는 없다.

얼마 전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쳐 준 적이 있었다. 수세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마당을 파서 정화조를 묻고 화장실에서 정화조까지 배관을 해야 한다.

지켜보던 건물 주인은 화장실에서 정화조까지 거리가 멀다고 배관의 경사도를 크게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배관이 잘 된 줄 알겠지만 문제가 생긴다.

배관의 경사도가 크면 물만 먼저 흘러가고 찌꺼기는 어느 정도 가다가 배관 속에 남게 된다. 오래가지 못해 결국엔 배관을 뚫어야 한다. 그래서 물이 찌꺼기를 데리고 정화조까지 갈 수 있도록 이론에 따라 배관의 구배를 잡아주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서두르지 말라는 옛 사람들의 지혜와 격언들은 틀림이 없다.

이십여 년 전 해외건설 현장에서 배관공으로 몇 년간 근무를 했다. 그곳에서 단독 주택의 상, 하수도 배관 공사를 담당 했다. 상수도는 압력 테스트만 거치면 되지만 하수도 배관은 검사 받기가 언제나 조심스럽고 까다로웠다.

이론과 실기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나는 일주일 동안 작업한 배관공사가 불합격되어 재시공했다.

배수되는 물은 천천히 흘러가야 합격이고, 빠르게 흘러가면 불합격이다. 감독관은 배관 속에 테니스공을 넣고 한말의 물을 붓는다. 그리고 맨홀지점에 가서 공이 떠내려 오는 시간과 물의 양을 점검한다.

유속이 빠르면 진동이 생기고 미세한 진동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배관에 변형이 온다는 이유였다. 이런 과학적인 원리와 철저함으로 몇 세기 전의 건축물도 잘 사용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요란한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당시엔 웃고 넘겼지만 반생을 지나온 지금은 절실히 와 닿는다. 인생길이 여행이라면 조용히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

앞만 보고 달려 온 길에 주위의 소리도 외면하고 남의 흉내만 내며 살아오지나 않았는지, 생의 정점에서 삶을 반추해 본다. 앞서 온 사람도 뒤따라 온 사람도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다 같지 않을까. 이제 내려가는 길에서 바람처럼 이는 잡념도 욕망도 잠시 쉬었다가게 머릿속에도 맨홀하나 만들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