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나치게 아름다운 / 이윤기
아, 이 섬뜩한 예감들을 어쩌나! 청소년 시절이던 60년대. 나는 일본 문학을 퍽 좋아했다. 학교 공부는 팽개쳐둔 채 일본어를 배워 몇몇 일본 작가들 작품은 일본어로 읽기도 했다. <나쇼몽(羅生門)>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사양(斜陽)>으로 유명한 자다이 오사무. <유키구니(雪國)>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킨키쿠지(金閣寺)>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한꺼번에 실린 책이 있었다. <4인집(四人集)>이었던가? 읽고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웠다.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있을 당시, 아쿠다가와와 다자이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가와바타와 미시마는 일본에서 왕성하게 쓰고 있는 소설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가와바타의 미학에서는 거의 피 냄새라고 해도 좋은 만큼 섬세한 떨림이, 미시마의 애국심에서는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과 낭자한 선혈이 느껴졌다. 나는 이 두 작가 역시 천수를 누리기 힘들 것임을 예감했다. 참전 군인 노릇하던 1971년과 1972년에도 나는 베트남에서 가와바타와 미시마의 소설을 읽었다.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1971년 미시마가 할복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듬 해에는 가와바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책 편집자도 피 냄새,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나는 나의 미학적 감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끝. 끝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문학을 ‘좋은 대답’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른 물음’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얀 나비’, ‘이름 모를 소녀’ 같은 노래를 부른 김정호라는 가수가 있었다. 70년대 중반 나는 잡지사 기자였다. 많은 가수들을 인터뷰하고 다녔다. 포크 계열의 통 기타 가수들은 거의가 내 인터뷰의 대상이었다. 알 만한 가수들은 거의 다 만났다. 김정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나는 김정호를, 굉장히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떨림을 약간 과장해서 부르는 버릇이 있는 그의 노래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1991년 미국 땅을 밟은 뒤에야 나는 ‘니르바나’ 라고 불리는 보컬 그룹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국 사람들은 ‘니르바나’ 를 ‘너바나’ 라고 불렀다. 리더 싱어인 커트 코베인의 노래가 도무지 심상치 않았다. 지독한 허무주의자인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음악 채널에 등장해서 절규하는 그에게서 나는 또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나보다는 아들딸이 그의 노래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 살던 곳에서 뉴욕으로 여행할 때는, 아들딸이 자동차 여행을 지루하게 여길까봐 그의 노래를 자주 틀었다. 우리 살던 곳에서 뉴욕까지는 자동차로 15시간 거리였다. 커트 코베인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허무주의는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커트 코베인을 두고 아들딸에게 농 삼아, ‘아무래도 사고칠 것 같은 아이’ 라고 했다. 코베인은 1994년, 아무래도 자기가 대중을 기만한 것 같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7년 친구의 자동차에 편승, 강원도 지역을 여행했다. 친구는 음악이 없으면 운전이 잘 안 된다고 할 만큼 노래 듣기를 좋아했다. 그가 트는 노래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싫어하는 노래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기도 여주 근방에서 들은 노래가 심상치 않았다.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7년째 미국 생활을 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내가 모르는 가수가 많았다. 젊은 목소리에 실린, 결코 젊지 않은 노랫말이 인상적이었다.
(전략)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가네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 다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국내의 연예계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던 내가 친구에게 물었다. 나와, 노래와 가수를 좋아하는 친구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
“이 노래, 무슨 노래야? 이 가수, 누구야, 도대체?‘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야. 왜? 잘 부르지 않나?”
“잘 부르기는 하는데. 젊은 녀석이 이렇게 슬픔의 끝을 알아 버려서 어떻게 살아?”
“죽었어, 벌써. 작년에.”
슬픔의 끝, 아름다움의 끝, 끝의 슬픔, 끝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나는 김소월의 시를 좋아한다. 그의 아름다운 시를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는 너무 슬프다. 소월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소월이, 공을 끝까지 보면서 치는 정교한 타자(打者)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가 만일에 김소월과 동시대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가 천수를 누리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이 시대를 울리는 절창에서 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종말을 예감한다. 하지만 절창은 거기에서만 꽃핀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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