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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괜찮아 / 서 숙

괜찮아 / 서 숙

 

 

 

노인 

전철역에는 계단이 많다. 노인은 엘리베이터 대신에 운동삼아 계단에 도전해 본다. 빠른 걸음걸이로 뛰듯이 계단을 오르내리던 때가 어제만 같건만 예상대로 만만치가 않다. 다리에 힘이 없어 한 단, 한 단 힘들여 오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앞지른다. 노인은 그들에게 거치적거릴까봐 꼭 잡은 난간 쪽으로 몸을 더욱 붙인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성큼성큼 옆을 스치는 발걸음들이 더욱 요란해진다. 그들 중에 한 여인이 시야에 잡힌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팔랑이는 치맛자락에 작별의 시선을 보낸다. 그가 층계를 다 오르기 전에 기차는 떠난다.

이윽고 마지막 계단을 딛는다. 숨이 차다. 힘은 들지만 약간의 성취감으로 얼굴이 홍조를 띤다. 조금 전까지의 인파는 썰물로 사라지고 승강장도 선로도 텅 비었다. 그런데 벤치에 앞서간 그녀가 앉아 있다. 기차를 타지 않은 여인이 몹시 반갑다. 당연히 안 보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혹시 자기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하고 잠시 어이없는 착각을 한다. 다가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다. “전철 안 타셨네요.” 낯선 사람이 아는 척 느닷없이 말을 시키니까 약간 당황한 채로 그럭저럭 상냥한 표정이다. 아마도 그다지 바쁜 걸음이 아니어서 기차를 그냥 보냈나 보다.

기차가 왔다. 자리가 비어서 그녀 옆에 앉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다. 그런데 보기보다 나이가 꽤 많은가 보다. “흰머리가 있네요.” 노인의 작은 목소리를 잘못 알아듣고 “네?” 그녀가 반문한다. “흰머리가 있어요. 세월은 못 속이지요?” 그런데 “아, 네에.”하고 대답하는 여인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실없는 노인네로 여겨지나 보다. 더 말은 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가 기차를 타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 반가웠을까. 젊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젊지 않은 것은 왜 또 좋았을까. 갑자기 자신과의 거리가 좁혀진 친밀감이 생겨났던 것일까. 평소 소심하여 아무한테나 말을 트는 성격도 아니데 오늘따라 터무니가 없다. 설레는 마음을 너무 드러내서 실례를 범한 것 같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그런 마음의 동요가 인다는 게 몹시 신기하다.

 

여인

전철의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막 오르려는데 덜컹거리며 기차가 역으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린다. 후닥닥 사람들이 뛰다시피 계단을 오른다. 급할 것 없는 그녀도 괜스레 덩달아 속도를 낸다. 한 노인이 난간을 잡고 느릿느릿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녀는 노인에게 무심하기는 해도 누가 될까 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지나친다.

서두르면 기차를 탈 수 있다. 그런데 그냥 보낸다. 그녀는 비어 있는 승강장에 남겨지는 기분을 즐긴다. 왠지 마당에서 막 비질을 끝낸 기분이라고나 할까. 망중한(忙中閑)의 기분이라고 할까. 탈 사람은 다 타고 내린 사람은 출구로 향해 바삐 사라지고 난 후의 아주 잠깐 동안의 여백을 좋아한다. 아마도 여행자의 낭만을 누려보고 싶은 때문인가 보다. 더구나 이 역은 지하가 아닌 지상이라 옛 기차역의 분위기가 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읽을거리를 들고 잠시 머물기도 한다. 지금도 마침 서둘러 기차를 탈 만큼 바쁘지 않다. 빈 벤치에 앉아 빈 선로에 시선을 보낸다.

홀로 조용한데 느닷없는 말소리에 얼굴을 돌린다. 아까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노인인가 보다. 무척 반가운 듯 옆자리에 앉으며 환한 얼굴로 말을 붙인다. 계단을 오를 때 눈에 띄었나 보다. 곧 전철이 왔다. 한가한 시간이라 좌석이 많이 비었다. 노인이 또 옆자리에 앉는다. 속으로 빈자리도 많건만 왜 하필 또 옆에 앉으신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흰머리가 많다고 말을 시키는 노인이 약간 거북해진다. 계속 말상대를 해야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의 내심을 읽었는지 더는 말을 시키지 않는다. 다행이다.

몇 정거장 자나지 않아 단정하게 앉아 있던 노인이 내린다. 여인은 그가 뒤돌아보면 목례라도 보내려고 했는데 그냥 휘적휘적 나아간다. 노인을 꺼려하던 좀 전과는 달리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것은 약간 섭섭하다. 느릿느릿 계단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맘이 쓰인다. 조금 친절해도 괜찮았을 것인데……. 가벼운 후회의 마음이 인다.

이상하게도 며칠간 자신도 모르게 노인의 뒷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자신의 흰머리에 반색하던 그 노인의 심정이 두고두고 헤아려진다.

세월은 속절없고 세상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그래도 괜찮아. 살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