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대장장이 / 변해명
12월 마지막 달력 앞에 서면 덧없이 보낸 시간을 되돌아본다. 부질없이 보냈으니 남겨진 것이 없는 흘러간 시간이다. 담금질하지 않은 시간은 빈 그릇 같다.
대장간에서 불질을 하지 않아 담금질되지 않은 쇠는 무르다. 무른 쇠는 쓰일 곳이 없다.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었다가 찬물 속에 넣는 일을 담금질이라 한다. 물에 담갔다가 다시 달구어 치고, 또 담갔다가 달구어 치기를 몇 번 그런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그런 담금질을 할 때 불질을 잘해야 한다. 그 불질에 쇠를 잘 다루어야 숙련된 대장장이다. 쇠스랑은 꺾인 쇠가 펴지면 안 되니 8번을 담금질을 하고 칼은 5번을 담금질을 해야 그 기구의 속성에 맞는 쇠의 강도를 지니게 된다. 부질없음이란 말은 ‘불질이 없음’이란 말에서 비롯되었다. 불질은 담금질하기 전 쇠를 녹이는 과정이다. 무엇을 만들기 이전에 쇠의 됨됨이를 만드는 과정이다.
집념의 불질로 달구고 녹여 담금질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보낸 시간은 마지막 달력 앞에서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나는 부질없이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서울 광화문 내수동 골목에 있던 대장장이가 떠오른다. 풀무질로 달아오른 열기가 뜨겁게 휘감기는 곳에 웃통을 벗은 건장한 남성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내리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벗은 웃통이 땀에 번들거리고, 팔의 근육이 무거운 망치를 들어 내리칠 때마다 탄력 있게 움직이고 활력이 넘치는 젊음이 눈에 보였다. 추남에 절름발이인 대장장이 헤파이토스가 끊임없는 담금질로 올림포스의 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고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우쇠를 불에 달구어 연장을 만들기에 불질을 하는 풀무질이 쉴 새가 없었다. 용광로에서 불덩이가 된 쇳덩이를 대장장이는 모루(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겨댔다. 큰 쇠붙이는 대장장이가 집게로 잡고 마치(망치보다 작은)로 한 곳을 두드리면 조수는 큰 망치나 메로 그 쇳덩이를 내래쳤다. 두 사람은 장단이 맞고 장단 따라 쇳덩이가 낫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두 일꾼이 번갈아 두드리고, 대장장이가 가볍게 두드려 세 사람이 장단을 맞추기도 했는데 세 개의 마치가 장단을 맞추었다. 국악의 ‘세 마치 장단’의 어원이 여기서 유래했다.
대장장이의 손은 힘과 저력과 치밀한 구성과 무엇을 만든다는 주제가 담겨 있다.
어떤 시우쇠도 그 손에 들어가면 작품이 되고 귀한 존재가 된다. 쇳덩이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은 언제나 빛나고 겸손하다. 한눈을 팔거나 적당히 넘어가지 못한다. 마치질 순간순간을 미룰 수 없도록 쇳덩이는 이내 굳어져서 순간을 놓칠 수가 없다.
안성유기가 예로부터 유명한 것은 품질이 좋은 놋쇠를 부어내서 두드려 모양을 내고,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만들어 낸 유기이기 때문이다. 방짜 유기는 놋쇠를 두드린 방망이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꽹과리나 징이 악기가 되고 깨지지 않고 맑은 소리를 내는 것은 방짜 유기의 기술이 빚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 대장장이나 유기공인은 오랜 세월 숙련된 수련과정을 거쳐야 장인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 둘레에서 사라져 버린 대장장이지만 요술상자처럼 붉은 쇳덩이가 여러 모양의 물건들로 만들어지는 창작의 산실이었다.
나는 삶에서 긴장이 풀리고, 또는 어영부영 많은 시간을 보낼 때면 대장장이의 담금질과 방짜 유기의 방망이자국을 떠올린다. 자신을 담금질하고 방망이질로 내 자신을 투명한 소리가 울리도록 자져야 한다고.
부질없이 보낸 시간들. 문득 시간의 시우쇠를 담금질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시간들은 아무 소용도 되지 못한 채 삶의 텃밭에서 무용한 존재로 내 앞을 스쳐갔을 것이다. 백 번, 천 번 두드려도 영혼의 무른 쇠는 단단해 지지 못할 것인데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보낸 세월은 내 영혼을 굳은 쇳덩이로 병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새아침 방망이로 다져진 방짜 유기의 징을 두드려 보고 싶다. 그래서 맑은 음색으로 천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대장간 모루 위에 내 몸을 던져 담금질을 하고 싶다. 작두 위에서 보는 무녀처럼 시퍼런 칼날을 세우는 영혼의 대장장이가 되어 무디어진 내 모습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싶다.
지금 나는 내일의 망치를 들어 올릴 손이 떨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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