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의 뜰, 그리고 관념수필 / 김진식
추상의 뜰이다. 온갖 생각으로 널브러진 언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주인은 집을 짓고자 한다. 의미만 있고 모양을 알아볼 수 없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본 듯한 원형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의미를 찾아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주인은 이런 언어를 다룰 줄 안다. 직관이 꿰뚫고 관념이 개성과 뜻을 지어간다. 이렇게 지은 집은 허구의 집이 아니다. 더 근원에 가까운 본디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이런 상상의 집을 세워야 한다. 수필이 격을 높이고 문학의 중심에 들기 위해서는 이런 집이 필요하다.
무슨 도량道場이나 이데아의 학사學舍를 짓자는 것이 아니다. 맑은 바람이 드나들고 구름이 머물다 가며 경지가 머무는 그런 집이다. 장자莊子의 염담恬淡이 무위로 자리 잡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애지愛知를 어르며, 니체의 초인이 쉬어갈 수 있는 집이라고 할까.
장자와 니체는 이미 지어본 집이다. 단지 수필이라는 텃밭이 아닐 뿐이다. 지금 이들의 글이 수필의 뜰에 든다 해도 괜찮을 성싶다. 장자는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재단했다. 좁은 땅에서는 날개를 펼 수 없어 어바리가 되는 대붕大鵬은 거북하고 딱하지만 때를 만나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을 얻는다면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날 수 있고, 대춘大椿의 사계는 백년에 가깝다. 뱀 새가 봉황의 흉중을 가늠할 수 없고 하루살이가 다음날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처럼 의표를 찌르는 호대한 발상도 그렇지만 그 비유의 초월성은 참으로 대단하다. 니체는 어떤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등장시켜 신의 죽음을 말한다. 신의 죽음은 신에 의탁하고 있는 세상의 부정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보다 더 다가오는 것은 순화된 정서다. 그래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어떤 비평가는 시극詩劇이라고 했지만 주정적 정서와 서술적 표현은 관념수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시수필로 부르고 싶다.
장자나 니체를 통하여 상상력의 확장과 존재의 소멸을 생각해 본다. 이에서 현재 우리 수필이 안고 있는 아쉬운 점을 보충할 수 없을까. 이들의 직관이나 상상력은 허구의 집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나 각성으로 세운 집이다. 그렇다고 문학적 창조성과 괴리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손님을 들이지 않고 주인이 연출하는 것이다. 장자의 초월적 발상이나 거리낌 없는 우화적 비유는 답답함을 씻으며 개운하게 하고, 니체의 초인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 발상이나 서술이 메마른 것이 아니라 문학의 특징인 축축한 정서를 담고 있다. 이런 변용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이런 발상이나 상상은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순환과 인생의 의미를 나름대로 체득한 경지가 아니라면 허황한 공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관념수필은 쓰기도 어렵거니와 읽기도 어렵다. 관념의 추상성 때문이다. 이를 간파하고 가상의 새나 나무를 등장시켜 우화로 깨치게 하거나 초인을 등장시켜 삶의 명암을 확인시킨다. 실존적 자아 앞에서 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관념적인 글을 읽으면서 메마름을 느낄 수 없다. 언어를 변용하거나 순화시켜 축축한 정서로 닿아오게 한다. 초월적인 발상에 비유와 정서를 담아 경탄과 감동으로 다가설 수 있다면 관념이란 것도 어렵지 않게 뚫릴 수 있다.
수필의 갈래에서 관념수필은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것을 누가 접근하려 하겠느냐’다. 철학을 한 사람들이나 기웃거리는 정도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닐 것이지만 고정된 틀을 벗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뜻밖의 발군拔群을 기대할 수 있다.
어쨌든 이에 대한 관심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수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있어서 이만한 것이 없고 발상 여하에 따라 허구적 상상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도 창조성을 드러내며 자연과 인생을 깨치는 경지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수필의 발흥은 결국 수필문학의 발흥이며 위상을 높이는 데도 이만한 것이 없을 성싶다. 추상의 뜰에서 대붕이 날개를 푸득거리며 비상飛翔하고, 초인이 탄생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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