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 / 변해명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면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 보게 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는 기쁨과 가슴 설렘으로 기다려지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야속하리만큼 나이 먹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 나이만은 건망증 속에 깊이 묻어두고 잊고 살고 싶은 기분이다.
새해 아침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나면 “너는 금년에 몇 살이 되지?” 그리고는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니 나잇값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잇값이란 말 속에 담긴 의미는 1년 동안 외형적인 성장은 물론 내면의 성장까지도 나이로 가름하니,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그만큼 성숙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럴 때면 새해 희망과 설계를 말씀드리고, 전년과 다른 모습으로 타인들 앞에 서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다.
이제는 내가 아랫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주문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말에 해, 돌, 설, 살, 달, 등 시간과 관계되어 나이를 가늠하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설날의 설은 ‘살다’의 어간이 독립된 것이고, 삶을 시간상에서 구분한 것이다. ‘한 살’로 살을 구분 지을 때 ‘살’은 생애의 한 마디로서의 1년을 의식하는 말이 되는 것인데 그 말이야말로 한국인의 존재의식이 시간상에서 어떤 흐름을 나타내는가를 알게 한다. 한 살이란 사람의 다음 마디로 넘어가는 것이 나이니 새해를 맞는 설은 삶의 과정에 있어 한 단계 오르는 시작인 것이다.
나무가 겨울을 견뎌야 한다. 그 목숨을 건 겨울나기를 넘어서야 비로소 새싹이 돋고 꽃망울ㅇ르 달 수 있고 꽃을 피우는 봄을 맞게 된다. 그런 나무의 겨울나기처럼 우리 삶에는 거쳐야 할 단계가 있고 단계마다 마련된 내면의 성장 요건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을 갖추었을 때 나잇값에 걸맞은 모습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청초에도 나는 그 나잇값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생각들로 자신에게 주문하고 각주를 달고 돌아볼 것이다.
20대에는 시인 아닌 사람이 없고, 30대에는 유물론다가 아닌 사람이 없고 50대에는 유신론자가 된다는 말처럼, 20대에는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하는 일에 열중해서 아름다움을 꿈꾸고,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청춘은 아름다워라 한다. 그러나 3, 40대에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경제활동으로 돈을 모으지 못하면 평생을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고, 삶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50대에 현명하지 못하면 늙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여유와 지혜가 없어 추한 모습으로 삶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처럼 사람의 나이에는 나잇값에 해당하는 세월의 철학이 담긴다. 소년 시절은 사물을 인지하는 시기고, 청년기는 자기의 존재를 예감하고 자기를 의식하는 시기라면 장년은 자신이 택한 삶의 모든 수단이 옳고 그른 것인가 의심해 보는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삶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었다. 살아온 날들이 결코 자신의 의지나 계획대로 이루어져 오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많은 일들이 필연만이 아닌 우연과 순리와 연결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고, 노년에 임하는 지혜로운 모습으로 서야 하는데 20대의 낭만으로 인생을 꿈꾸기도 하고, 30대의 정렬로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그렇게 나이를 잊고 젊은이로 살고 싶은 욕심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고 병들면 못 노나니’하는 우리 민요의 가락처럼 늙고 병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조바심을 키우기도 한다.
두보가 47세 때 지은 ⌜曲江二首⌟라는 시를 읊는다.
朝會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돌아올 제 날마다 봄옷 저당잡혀)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 술 외상은 간 곳 마다 있는 것)
人生七十古來希(인생칠십고래희: 인생칠십은 예부터 드물어)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 꽃 사이 지나는 나비 정이 깊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 물에 스치는 잠자리는 느릿느릿 날아간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유전: 말 전한다 풍경도 함께 흘러 변하는 것)
暫時相常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잠깐 동안 서로 어루만져 보리라)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무니 물가의 풍경도 흘러가며 변하는 것, 무엇에 자신을 묶어놓고 연연할 것인가. 봄옷이라도 벗어 저당 잡혀 취해봄이 어떨지’ 하는 두보의 시흥 속에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한 선비의 마음이 들어 있다.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짧은 인생, 술 한 잔 마시고 취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연륜이 아니면 그런 여유와 멋을 지닐 수 있을까.
또 한해를 맞는다.
살아오면서 무엇을 잘못했고,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며, 인간관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따져서 반성하고 시정하고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새해설계를 끝낼 것이 아니라. 늘 마음속에 함께하는 정다운 사람들과 만나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나누며 두보처럼 여유로운 시선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는 새해를 설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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