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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댑싸리 / 이기호

댑싸리 / 이기호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 ‘리리 리 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나요? 이 노래 중에 댑싸리가 옛날 내 고향 광천, 우리 집 뒷마당가에 살았습니다.

처음엔 작달막하던 것이 여름을 지내면서 키를 훌쩍 늘리더니, 가을이 지나면 웬만한 아이들 키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작은 것은 뿌리째 뽑으시고, 제법 큰 것은 톱으로 잘랐습니다. 그래서 뒷마당에는 베어 낸 댑싸리가 마당 그득히 쌓여 뽀오얀 허리를 내놓고 물기를 말리우고 있었습니다.

잎새도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줄기와 가지만 남은 댑싸리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빗자루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쓰여질 곳을 기다리며 누워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작은 것은 두세 그루를 묶고, 큰 것은 그대로 비로 만들어서는 이웃집에도 작은집에도 골고루 나눠 주셨습니다.

봄에는 버들잎과 앵두 잎과 벚꽃 잎과 개나리꽃 떨어진 것을 쓸고, 여름이면 분꽃과 나팔꽃과 장미꽃 잎과 보리 바심한 마당가를 쓸었습니다.

가을이면 뽀얗게 마당 맥질해 놓은 앞, 뒷마당을 번갈아 쓸고, 멍석에 널어 놓은 낟알(아이들이 고무래질하다 쏟아 놓은 것)을 살며시 긁어모으기도 하였습니다.

도리깨질이 끝난 콩깍지와 노란 콩알을 쓸어 모을 때도, 들깻대를 털고 난 후 키질 뒤의 쭉정이 깨를 쓸어 낼 때도 댑싸리비가 쓰였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진 댑싸리비는 슬펐습니다. 밤 늦도록 일을 한 날은 몸이 너무 아파서 밤새 끙끙 앓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놀 수 없는 것이 또 이 빗자루의 운명이었습니다. 다시 토방가의 억센 흙먼지를 쓸고, 아이들이 들랑거리는 골목길도, 이웃집 새댁이 물 길으러 오는 대문 앞도 쓸었습니다. 언니가 불 땐 아궁이 앞과 불티 앉은 부뚜막도 쓸었습니다. 아궁이 쓸면서 화상을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가스러져 갔지만, 계절만은 또 찾아와 겨울이 왔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흰눈에 쌓여 환희에 찬 탄성을 지를 때, 댑싸리비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울 수만 있나요?

얼어붙은 발가락을 절뚝거리며 마당의 흰눈을 쓸고 샘가에 쌓인 눈과 장독대를 수북히 덮은 눈을 쓸어 내렸습니다. 돼지우리 위의 눈도, 다 허물어져 쌓인 눈의 무게를 이겨 내지 못하는 헛간 위의 눈도 연민의 마음으로 쓸었습니다.

댑싸리비는 랜딩 기어가 작동되지 않아 동체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마지막 정열로 댑싸리를 베어 냈던 그루터기 위에 쌓인 눈을 쓸었습니다.

이윽고 수를 다한 빗자루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댑싸리비가 친구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그가 하던 일을 눈물을 삼키며 하고 있었습니다.

댑싸리 베어 낸 자리에도 아지랑이가 찾아오는 봄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엔 이미 가시철망이 드리워져 봄은 뒷걸음을 하려 했습니다. 그때 작은 한 방울의 눈물, 그루터기를 쓸면서 남모르게 흘렸던 한 방울의 눈물로 하여 댑싸리는 혼신의 힘으로 움을 틔웠습니다. 가시에 찔리면서도 참으면서 댑싸리는 고운 꿈을 키워갔습니다. 키가 훌쩍 커서 가시철망 너머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꿈을요. 벌과 나비도 이따금 찾아와 댑싸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종달새가 우지짖는 여름이 지나가면, 열무김치 익고 풋고추에 매운 맛 드는 늦여름이 지나가면,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우리 아버지는 이것들로 다시 비를 만드실 테지요. 댑싸리도 이제금 베어질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여물어 갔습니다.

이제 나는 힘이 없을 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던 수수비도 손 안에 두고 싶고, 수수비보다 더욱 힘이 센 대나무비도 갖고 싶지만, 조용히 가버린 댑싸리비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같이 똑똑한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 그렇게 엉성하고, 볼품없는 것이 어디에 있을 법이나 하나요? 아름다움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쑥맥 같은 댑싸리를요. 기껏 꽃잎이나 쓸고, 짚검불이나 쓸고, 탑새기나 쓸어 대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말입니다.

있다구요?

네, 여기 있어요. 저예요. 꺼부성한 저요.

당신의 뒷마당을 살짝 찾아가서 봄바람에 무심히 진 꽃잎과 가을 뜨락의 뒹구는 낙엽과 짚검불과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당신 지붕 위의 흰눈을 쓸어드릴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