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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참새 한 마리 / 박동규

참새 한 마리 / 박동규

 

 

봄날처럼 포근한 겨울날 흰 눈은 나비처럼 춤추며 하락의 즐거움을 누리고 지상으로의 이동을 끝내고 있었다.

땅 위의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일시나마 풍요와 해조(諧調)를 연출하면서 구름 거둔 쪽빛 하늘 밑의 만상이 햇빛으로 하여 더욱 빛나는 정오였다.

나는 감연히 일어서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일탈하여 산곡(山谷), 아니면 강류(江流)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초의 풍정에 젖어보기를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발 내딛는 지표 위에 찍혀지는 하얀 발자국, 눈꽃 피어 늘어진 가지 끝에 얹혀 뚫린 산길, 자욱눈이 가벼운 눌림으로 하여 자아내는 마찰음, 이런 때 세상은 모든 오염을 세척하여 쇄락(灑落)한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이 산록의 외길 저쪽에 한 점으로 나의 모습이 가물거린다.

산길을 가던 나는 참새들의 지저귐으로 하여 발을 멈추었다. 지저귐이 아니라 그것은 위급을 알리는 비상신호였다.

‘짹짹짹짹’ 날쌘 동작으로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날으면서 울부짖는 참새들!

나는 어릴 적부터 참새들과는 친근한 사이였으므로 그들과의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다갈색 모자는 눈에 익은 터이요, 그 동그랗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아래 콧등으로 이어지는 각질 삼각추(角質 三角錐)의 틈으로부터 울려나오는 피리성 고음파는 귀에 익은 바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몸짓과 소리로써 그 개연적인 의태(意態)는 식별할 수 있었으므로 지금 저 부르짖음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장엄한 전진을 축복하는 소나무들의 눈꽃과 그 가지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쪽빛 하늘과 빛나는 태양으로 조화를 이룬 경지에서 참으로 이 ‘짹짹짹짹’ 소리는 일대 사단(事端)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고향 옛집의 뒤에는 큰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 속은 으슥하고 대나무를 벤 그루 밑이 날서 사람의 침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철 새들의 낙원이었다.

참새는 물론 방울새, 굴뚝새, 촉새, 산비둘기, 멧새, 콩새, 갈새, 꾀꼬리, 뻐꾸기, 소쩍새, 휘파람새, 때까치뿐만 아니라 박쥐, 족제비, 삵, 도둑고양이, 구렁이까지 동서(同棲)하고 있었다.

그 중 나는 참새들과의 연분이 도타와 가장 친근하였고 나의 어린 시절의 회억에서 참새들과의 사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텃논 새보기, 허수아비, 팡개, 딸, 참새 때문에 가을 한철을 논두렁 곁에서만 살아야 했던 예닐곱 살 때 새들은 저를 몰아내려는 모든 장치를 비웃으며 실컷 배를 불린 다음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포만희열가(飽萬喜悅歌)를 부르는 것이다. ‘찌주굴 째주굴’이다.

봄날 먼 벌판에 아지랑이 가물거릴 때 ‘째액째액’ 암참새가 낭군 영접을 위하여 연정가를 부르면서 호응, 한동안 ‘백조의 호수’가 아닌 춘작(春雀)의 ‘발레춤’을 추는 것이다. 노오란 부리를 치어들고 ‘찌익찌익’은 새새끼의 식이구청사모곡(食餌求請思母曲), 해 저물어 땅거미 기어들고 닭이 홰를 탈무렵, 보금자리를 찾아 황급히 돌아와 ‘찍찍찍’은 ‘환소귀거래사(還巢歸去來詞)’, 가을 아침 날이 새면서 ‘찌찌찌찌’는 ‘조기호우유행가(早起呼友遊行歌)’이던가!

나는 소리나는 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화학성 가느다란 섬유로 짜여진 새그물에 걸린 여러 마리의 새들이 얽매어 달려 있었다. 목을 매달은 놈, 죽지가 그물코에 걸려 발버둥치는 놈, 발목이 이리저리 얽혀 빼내지 못하는 놈…. 그물은 그 색깔과 가늘음으로 하여 얼른 보이지 않았다. 새들이 몸부림칠 적마다 가장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지극히 우호적인 표정으로 새들의 신체를 한층 더 깊이 포박해 가고 있었다.

정작 “짹짹짹짹”의 발령자는 그 곁에 있었다. 잔솔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헤집고 들여다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자에 두자 크기의 대여섯 새장 안에 수백 마리의 참새가 갇혀 있었다. 동료의 체중 위에 제 체중을 더하면서 맨 위에 뚫고 올라온 놈이 위급을 하늘 아래 외치고 있는 것이다.

참새들은 기피자가 없다. 나는 일찍이 구렁이의 입에 들어가고 있는 동료의 “짹짹” 시위하는 장면을 예의 대나무 숲 무대에서 관람했던 것이다.

장본인은 밑에 깔리어 할딱거리는 몇 마리의 새였을 것이다. 처음 새장의 주인에게 납치된 그들은 ‘SOS’를 부른 것이리라. 그 소리를 듣고 과감히 동족 구출을 위해 모인 참전자들은 차례로 그물에 걸린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은 ‘사람에게 잡혀 죽게 된 모든 목숨 있는 것을 놓아주라’ 하셨다. 부처님은 지금 나의 손을 써서 이 가엾은 목숨들을 놓아주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의지에 의하여 팔을 내밀었다.

두 발이 코에 걸려 삶을 체념한 듯, 축 늘어져 있는 맨 아래 걸린 놈을 풀어 옛날에 그랬듯이 살짝 쥐어 올렸다. 동그란 이중원이 작고 새까만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고 있는 참새, ‘범죄자는 바로 너였구나’ 단정하고 있었다.

볼쏙볼쏙 뛰노는 심장이 고동치면서 나의 심장으로 그 보드라운 털을 건너 체온을 따스하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폈다. 그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간 새! 차츰 적어지고 드디어는 좁살만큼한 점으로, 그리하여 시야에서 사라져 간 뒤에 나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풀어 놓아주고 있을 때, 예기한 바대로 한 더벅머리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누구요 당신은?”

“…….”

“애써 잡은 남의 새를 왜 놓아주는 거요?”

“…….”

“한 마리 오백 원이오.”

“…….”

“다 사시오.”

“…….”

값은 한 마리 삼백 원으로 낙착되었다. 호주머니 돈을 몽땅 털었다. 삼사십 마리의 새를 한 마리 한 마리 놓아주었다. 죽음에서 풀려나는 참새들은 저마다 그 심장의 고동과 그 체온을 남기면서 하늘 저쪽으로 탄환(彈丸)처럼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져간 하늘은 맑게 비어 있었다. 못 풀린 납치자들의 절규를 들으면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산은 새소리로 그 고요함을 더하였고, 새소리는 산의 고요함으로 하여 더욱 드러나고 있었다.

눈에 덮인 산은 그 숭엄함을 더하여 그 권위 앞에 한 점만도 못한 나의 작은 목숨을 그 위력 앞에 떨게 하고 거역할 길 없는 대자연의 큰 흐름은 참새보다도 못한 이 작은 생명을 손에 쥐고 그 심장의 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놓아주려는 것인지, 그리하여 저 빈 하늘로 참새처럼 날아가게 할는지, 생각하면서 봄날처럼 포근한 눈꽃 만개한 산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