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겨울 벚꽃 / 한명숙

겨울 벚꽃 / 한명숙

 

 

 

알몸의 나무들이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그 곁을 지나는 몸도 마음도 둥둥 떠가는 것 같다. 아파트 입구에 앙상하던 벚나무에 탐스러운 하얀 꽃이 만발하다. 표정은 없지만 그 모습에 저절로 걸음이 멈춘다.

하루 종일 주먹만 한 눈송이를 퍼붓던 눈은 발목이 잠길 정도로 사방을 감쌌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빙판이 되어 미끄럽고, 거리는 한산했다. 남편과 서로 부축하며 길을 걸어도 자꾸만 넘어졌다. 떨어져 조심조심 걷다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우리는 그만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섰다. 가로등 불빛에 나무들은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화사한 봄날에 보았던 벚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향기 없는 눈꽃은 나를 달뜨게 했다.

초등학생 아들은 겨울방학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눈을 기다렸다. 겨울방학은 시작과 동시에 눈이 와야 하는 것처럼 눈이 안 오면 겨울방학은 실감나질 않는다고 투덜대곤 했다. 나도 아이들처럼 눈을 기다렸지만 하늘은 좀처럼 눈을 내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새해 첫 날부터 눈이 내렸다. 애인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대동간 물도 풀린다는 우수를 앞두고 돌연 대설경보가 내렸다. 거리마다 봉분처럼 쌓여있던 눈이 아직도 거리를 지키고 있다. 햇볕이 드는 곳이나 마른 도로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그런가 싶더니 어느새 발목이 푹푹 잠길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려 눈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 만에 거리는 두꺼운 솜이불을 펴놓은 듯 두툼해졌고 여기 저기 교통이 두절되었다는 뉴스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외국에서도 엄청난 폭설로 피해가 발생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TV에서 몽골의 유목민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가축들이 맥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눈이 내려 먹이를 찾지 못해 굶주림에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가축들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어쩌면 그것은 머지않은 날 우리들이 겪어야 할 모습처럼 느껴져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했다. 달빛에 빛나는 눈꽃에 달뜨던 기억이 스쳐갔다. 이젠 그보다 더 멋진 풍경을 봐도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눈 덮인 뒷산의 풍경을 보도도 나는 말을 아껴야 했다. 방송을 들을 때마다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구원의 손길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연이은 대설경보와 대설주의보가 발령되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비닐하우스 지붕은 쌓인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정성껏 가꾼 채소와 과일이 하루아침에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린 농가들, 허탈해 하는 농부들의 모습. 조립식 건물이 무너져 오갈 데 없는 가정이 생기고 길거리에 갇혀버린 자동차 행렬은 장난감 병정처럼 죽은 듯 누워있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준다. 그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고마움을 금세 잊어버리는 인간에게 자연은 채찍을 드는 것인가. 눈이 안 온다고 몸살 앓던 녀석들은 눈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지겹고 무섭다고 한다. 자연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자세가 부족한 우리에게 어느 새 자연은 무서운 적이 되어버렸다.

뒷산의 나무들이 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손짓을 해댄다. 마음은 벌써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선뜻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아무도 걷지 않은 그 길을 보면서 마음만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