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풍경 / 허정자
2월의 중순임에도 추위는 한겨울 같았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칼날 같은 바람을 막으려고 외투의 깃을 올려보지만 춥기는 마찬가지다. 자꾸만 움츠려드는 어깨를 억지로 펴며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추위쯤은 아랑곳없다는 듯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역 광장으로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믿어 천당으로 가도록 합시다.’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 대합실로 향하던 나는 힐끗 소리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광장 한 모퉁이에 임시로 조립한 듯한 푸른 천막이 보였다. 그 안으로 오렌지색 조끼를 통일해 입은 남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길 위에서 큰 목소리로 오치는 저들이 누구인지, 어떤 눈빛인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혼자 천막 밖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은 중년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가는 행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건만 엄숙한 태도로 기 위에서 기독교(노상) 전교를 하고 있었다. 가끔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로 그때였다. 전교하는 그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내가 가야할 목적지의 반대편에 있는 그들 쪽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나는 불교신자다. 그런 내가 무슨 자석에 이끌리듯 이곳에 온 것은 전교하는 그들보다 그 앞에 있는 노숙자들 때문이었다.
전교하는 곳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의 한쪽 길바닥에 빙 둘러 앉아 있는 노숙자들. 헝클어진 머리칼에 때 묻은 옷을 걸치고 술잔을 따르고 있는 늙은 남자와 낡은 모자를 쓰고 더러운 손으로 소주잔을 받고 있는 젊은 남자를 비롯한 일곱 명의 노숙자들—.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노숙자 세계는 이런 것인가. 나이에 관계없이 힘센 사람이 우두머리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소주잔을 따르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냉기가 올라오는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찬 소주를 마시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아픈 추억 속으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생각할까. 아니면 바람처럼 떠돌아다녀야 하는 슬픔과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채 무거운 현실을 술로 잊으려는 것일까? 조각난 나무토막으로 꺼질 듯한 불씨를 피워놓고 한기를 달래며 둘러앉아 있는 노숙자들. 그들과 마주서서 전교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저토록 열심히 전교하는 그들은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저 불쌍한 사람부터 구원할 수는 없을까. 또한 노숙자들은 저렇게 열심히 외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마음의 안식과 행복을 찾을 수는 없을까. 돌아올 때가지 그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삶이란 무엇일까. 풀 수 없는 화두가 가슴을 무겁게 하던 풍경이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사주팔자 / 정임표 (0) | 2013.02.21 |
---|---|
[좋은수필]바늘방석 / 송복련 (0) | 2013.02.20 |
[좋은수필]10원짜리 동전 / 임만빈 (0) | 2013.02.19 |
[좋은수필]조화 / 박경리 (0) | 2013.02.18 |
[좋은수필]아파트의 불빛 / 목성균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