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병 / 박월수
내 속에 든 것은 바람이라고 했다. 낯선 그 바람을 일러 세상을 오래 산 여인들은 산후풍이라 불렀다. 발바닥에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산후 바람 병엔 흑염소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다. 태깔 좋은 놈으로 골라 통째 달여 질끔 눈 감고 먹었다. 발바닥에 열은 곧 사라졌지만 온몸에 서서히 냉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이 시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배꼽 아래가 얼음장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사춘기에 접어든 둘째가 뱃속에서 세상 구경을 나오려 할 때였다. 이미 양수는 흘러내려 치마 아래가 흥건했는데 늦장가 드는 친구를 따라 함진아비가 되어간 남편은 행방이 묘연했다. 어린 딸아이와 나이 든 어머님을 앞세우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이었다. 당직의는 차트를 살펴보더니 수술을 권했다. 남편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그는 여전히 연락두절이었다.
어찌어찌 싸늘한 수술대 위에 누었는데 단잠에서 불려나온 담당 여의사의 협박 같은 한 마디는 수술용 메스보다 날카로워서 나를 질겁하게 만들었다. “양수가 터지려면 좀 일찍 터지던지, 왜 하필 자는 사람을 불러내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어떤 종족이든 고통은 오로지 암컷들의 몫이라고 했다. 버려진 고양이가 산통을 해도 그 울음이 고스란히 골목 안 여자들에게 전해지는 법이다. 마음속에 어머니를 갖지 않은 여자가 내 배를 가르고 아이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바람 같은 사람, 꼭 필요할 때 곁에 없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마취에서 깨어 배꼽 아래 칼 지난 자국을 내려다보니 실로 엄청났다. 그날부터였다. 내 몸에 바람이 든 것은.
몸에 냉기가 차면서 나는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다. 옷의 주름을 펼 때면 다리미의 남은 열을 배꼽 아래에 가져다 놓고 식혔다. 차를 마실 때마다 뜨거운 찻잔은 어느새 차가운 배 위로 먼저 가 닿곤 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다가도 배꼽에 더운 바람을 물어넣는 일이 허다했다. 때도 없이 난로를 껴안고 살았다. 단전에 구멍 뚫린 아내로 인해 남편은 꼼짝없이 발목이 묶이고 말았다. 볼모 아닌 볼모가 된 것이다. 따뜻한 손을 가진 그는 수시로 다리미와 뜨거운 찻잔이 되어 내 배꼽 아래에 손을 얹고 잠들어야 하는 희한한 벌을 서야 했다.
청하지 않아도 내게 온 바람은 변덕쟁이였다. 배꼽 아래에 머루르다 싫증이 나면 몸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냉기 묻은 바람이 뒷목을 끌어안고 나뒹굴 때면 나는 병원순례를 나섰다. 침을 맞았고 물리치료를 받았고 은행잎이 들어갔다는 약을 먹었다. 바람이 다니는 길마다 저리고 아팠다. 뒷목에서 시작한 통증은 내 몸의 온갖 마디에 똬리를 틀고 쑤시고 결리게 만들었다.
바람 든 무를 자르다가 문득 내 속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속을 비워두지 않아 바람 길이 막힌 것은 아닐까. 바람이 통한다는 건, 기와 혈의 순환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피돌기가 잘 이루어진다면 냉기가 어느 한 곳에 머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새도나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기(氣)가 흐른다는 붉은 땅 새도나는 내게 우주와 사람의 기운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었다. 흉터 깊은 단전에 마음을 모으고 호흡을 시작했다. 맑은 우주의 기운을 길게 들이 쉬고 몸속의 탁한 기운을 훑어 두 배로 길게 내 뱉었다. 조금씩 호흡을 늘려 나갔다. 익숙해지면서 배꼽 바로 뒤 명문혈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곤 주먹을 움켜쥐고 단전을 두드렸다. 북소리가 울러 퍼지듯 진동이 온 몸에 물결쳤다. 뭉치고 고여있던 응어리들이 풀리면서 혈이 돌고 기가 움직였나 보다. 차츰 배꼽 아래가 따뜻해 오고 있었다.
그토록 쉬운 원리를 모르고 많은 날을 고통 속에 지냈다. 어찌 보면 행복한 날들이었다. 체온을 나누면 같아진다는 이유로 언제든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차츰 내 몸이 더워지고 있으니 나보다 더 뜨거운 남자와 굳이 붙어 지낼 필요까지야 있을까. 하나 이 원리를 요긴하게 써 먹을 날이 있을 것도 같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우리 둘 사이가 시들해질 것 같은 눈치라도 보이면 나는 그 길로 ‘단전 울리기’를 그만둘 생각이다. 그리하여 서서히 몸이 차가워지기를 기다려 다시 뜨거운 그 남자에게 기댈 테다.
배꼽 아래 드리운 칼의 흔적을 내려다본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소중한 내 아이가 세상으로 나온 문이 거기에 있다. 그 문으로 들어찬 바람으로 해서 떠돌기 좋아하는 남편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한동안 불편하고 차가웠던 기억들은 돌이켜보면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내게 준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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