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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왜곡된 시선 / 조재은

왜곡된 시선 / 조재은

 

 

 

 

선명하고 밝던 텔레비전 화면이 뿌옇게 보였다. 화면을 닦았다. 안경 렌즈를 몇번씩 닦아도 글씨가 아른거렸다. 그제야 안과를 찾았다. 백내장 수술을 하니 텔레비전 화면은 흐리지도 않고 안경을 쓰니 글씨는 선명하게 보였다.

 

영화 <라쇼몽>에서 살인 사건을 목격한 네 사람, 사무라이, 그의 아내, 산적, 나무꾼의 증언은 서로 다르다.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가 각 증언에 스며있어 어느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모호하다. 네 개의 왜곡된 시선은 진실을 깊게 묻어버린다. 절대적 진리, 그것은 약하고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머물지 않는다. 명백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세상은 영화나 현실에서 닮은꼴이다.

요즘 겪은 두 가지 일은 내 눈이 흐려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책 읽는 모임에서 그녀는 눈에 띄게 옷을 잘 입었다. 그녀의 옷은 만날 때마다 바뀌고, 디자인과 색, 옷감의 질로 보아 고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빈틈없는 그녀에게서 어느 날 부터 흰머리가 많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중년의 남자가 “요즘 회색이 유행인데 옷과 머리의 색을 맞추셨군요.”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다. 평소 비꼬는 듯한 말로 회원들의 마음을 잘 상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성의 눈에 눈물이 꽉 차더니 밖으로 나갔다. 울먹이며 그동안 지난 얘기를 했다. 남편이 크게 의류사업을 하다 회사가 망해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져 생활이 힘들고, 요즘 아이 등록금을 내는 시기여서 머리 염색약 살 돈조차 없다는 것이다. 옷은 회사가 문을 닫을 때 팔지 못하고 남은 것이라 했다. 가끔 사치스럽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눈에 어리는 그림자를 감당할 수 없어 얼굴을 돌렸다. 표현을 안 했을 뿐, 나도 그녀가 옷값 지출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옷이 예쁘다는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준 옷”이라는 그녀의 대답을 나는 남편이 사준 옷으로 이해했다.

그날도 한의원은 대기실에 앉을 자리가 없게 만원이었다.

한 자리가 남아 겨우 앉았는데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계속 말을 시켰다. 어디가 아프냐, 침 맞은 지 오래 되었느냐고 묻고는 마음대로 진단을 내렸다. 거의 차례가 돼서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벗어 놓은 머플러가 예쁘다며, 깨끗지 않은 차림에 반찬 냄새가 나는 손으로 자꾸 만졌다. 그때 내 이름을 불러 급하게 일어나 진료실로 갔다. 침을 맞고 나오니 머플러가 없어졌다. 즉각 옆에 앉았던 사람이 떠올랐다. 둘러봐도 안 보인다. 불쾌한 마음으로 진료비를 내러 간호사에게 갔다. 그때 간호사가 곱게 접은 마후라를 내놓으며 “떨어트리셨다고 옆에 앉았던 분이 주셨어요. 빨리 나으시라는 말씀 전해 달라 하시네요.” 스스로에게 절망했다.

왜곡된 시선의 오차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사건을 볼 때, 보인 것에 자신의 생각이 첨가되어 그 뒤에 가려진 진실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추측이 아닌 중심의 진실,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겹다. 타인을 만날 때 그 사람 그대로를 마음에 새기지 않고, 내가 지니고 있는 많은 결함과 취약점을 가진 눈으로 상대방을 본다. 상대방의 부분을 보고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순간을 만나고 과거를 확신하고 미래까지 예측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 믿는다.

나를 설명해도 타인에게 전하지 못하는 건널 수 없는 거리. 내 눈의 크기 만큼만 보는 그들의 모습. 닿을 수 없는 이해의 거리가 멀다. 그 거리 만큼 아프다.

 

눈이 다시 뿌옇게 보이기 시작한다. 후발성백내장이 왔다고 한다. 정신이 실수를 반복하니 육체가 따라오나 보다. 이번에는 텔레비전이나 안경 탓을 하지 않는다. 몸이 낡기 시작하면 영혼의 눈은 밝아져야 하는데, 어리석은 왜곡된 시선의 치료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