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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멋진 남자 / 박경아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멋진 남자 / 박경아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헤어진 후에도 기억에 남는 만남, 그런 만남으로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만남은 사람과의 인연 말고도 아름답고 거대한 에너지의 자원인 대자연과의 만남이 있고 예술 작품과의 만남도 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프랑스 여행을 끝내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다. 우리를 맞이할 가이드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만치서 바바리 자락을 날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이가 있었다. 바라보던 몇 명이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도 참으려고 애썼지만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아뿔싸 이를 어째,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도 영문을 모른 채 따라 웃는다. 그 모습이 더 우습게 여겨져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몇 시간 전, 우리는 프랑스에서 빠릿빠릿한 20대의 물 찬 제비 같은 가이드를 만났었다. 그와 막 헤어진 후라서 새로운 안내자에게 걸었던 기대와 상상이 빗나간 것이다. 하필이면 대머리 노총각인가. 웃음이 가라앉지 않아 한참 웃고 나니 오히려 피로가 가신 듯했다.

버스 안은 즐거운 분위기다. 가이드의 집이 있는 유럽 최고의 아름다운 교육도시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낭만적인 곳이다. 풍요로운 물줄기와 풍부한 일조량, 지역 자체의 특성을 잘 살린 그곳은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맥주집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시골마을의 정경이 따사롭다.

가이드는 우리를 위해 이곳의 음악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나 보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바흐의 묵직한 무반주 첼로 곡을 선두로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의 곡을 잇달아 들러준다. 황홀한 순간이다. 여행지에서 듣는 그 나라의 음악은 먼 곳으부터 전해오는 전통과 역사를 비춰주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후세를 위해 작품을 선물로 남긴 예술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피나는 수련과 연마의 결과물, 우리는 그들의 문화와 유산을 너무 쉽게 접하고 있다. 아무튼 행운이다.

운전석 뒷좌석에 동생과 함께 앉았다. 가이드와 대화를 하다 보니 음악 공부를 하러 온 학생이 된 기분이다. 일행들도 여학생 둘을 앞자리에 앉혀 놓길 잘했다고 박수갈채다. 가이드에게 향하는 감사의 인사일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가이드 노릇을 하게 된 그는 피아노와 지휘 공부를 하러 온 우리나라의 유학생이다. 그는 수년 전 지휘 오디션에서 금난새에게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IMF 한파에 귀국의 기회마저 놓쳤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끝으로 러시아로 철학을 공부하러 떠난다고 한다. 그는 틈틈이 쓴 글로 이곳 한인 신문에 발표도 하고 있었다. 떠난다는 그 말에서 생활이 여의치 않음이 느껴져 측은지심이 생긴다. 이국의 땅을 헤매며 뿌리를 내리려는 그의 삶이 어찌 순탄하기만 할까.

어느덧 차는 엘카 강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라인 강의 지류인 고풍스러운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는 누구라도 시 한 편을 읊고 싶게 아름답다. 하늘이 비치던 엘카 강에 황혼이 번지는 모습을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바라볼 때면, 그 황홀경에 누가라도 취하고 만단다. ‘철학자의 길’ 역시 더없이 아름다운 산책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영화에 나오던 ROT OXEN이라는 맥주집이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가 부르는 곡마다 서슴없이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다. 겨울 나그네와 보리수, 홍수, 바위 위의 목동, 노래의 날개……. 그는 나의 동생과 함께 멋진 이중창도 들려주었다. 나중에는 ‘축배의 노래’를 합창했다. 큰 맥주잔을 부딪으며 영화의 장면을 흉내 냈다. 행복한 순간순간이다. 이렇듯 훌륭한 즉석 음악회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가이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도 ‘하이델베르크의 최고의 멋쟁이 브라보!’ 를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다.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감사하면서 러시아에서의 앞길이 평탄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돌아오는 길, 내 눈에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 부드럽게 춤추던 그의 손길이 내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