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 / 이정림(李正林)
우리 아파트 앞에는 공터가 있다. 주민들은 그 공터에 공원이 들어설 것으로 알고 착공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공원이 들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민들은 하나 둘 거기에 채소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농부들처럼 모자를 쓰고 종일 돌멩이를 골라내고 밭을 일구었다.
가꾸는 이의 정성으로 배추나 무 같은 밭작물들은 나날이 실해져 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들을 할 것이다. 여름내 손수 가꾼 채소로 김장을 담근다면 얼마나 더 맛있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밭 양쪽에는 자그마한 푯말이 세워졌다. 그 땅은 사유지이니 몇 월 며칠까지 농작물을 모두 수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 곳에는 공원이 들어서는 게 아니라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공고문이었다.
그 게시문을 보고 얼른 채소를 뽑아 가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치를 살피며 관망하는 듯이 보였다. 조금만 더 두면 배추는 속이 들어차고 무는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자 이번에는 그 밭에 빙 둘러 높은 담이 쳐졌다. 그 위압적인 담은 푯말보다 강한 경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쪽문으로 드나들며 수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밭은 다시 예전의 그 황량한 공터로 변해 갔다.
오늘 아침 나는 우연히 그 담벼락에 커다란 게시물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비에 글씨가 젖지 않도록 비닐까지 씌운 그 종이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할머니께서 힘들게 농사 지어 놓은 총각무를 조금도 남김없이 전부 가져가신 분, 할머니께서는 너무도 억울해서 잠도 못 주무시고 울고 계시지만 이왕 가져가신 것 김장해서 맛있게 드십시오.―큰마을 103동 804호"
아마 무를 도둑 맞고 서운해하는 할머니를 곁에서 보다 못해 손자가 써 붙여 놓은 글 같았다. 그 할머니 역시 가물 때는 물을 길어다 붓고, 잡초가 성하면 엎드려 허리가 아프도록 풀을 뽑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정성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그 상실감은 밭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부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손자는 "이왕 가져가신 것 김장해서 맛있게 드십시오." 하고 한껏 아량을 베푼 모습이 흐뭇하고도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내일 담벼락에 그 글에 화답하는 글귀가 나란히 붙여지기를 기대한다. "할머니가 애써 가꾸신 무를 순간의 욕심으로 뽑아 와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가 되는군요. 어느 댁의 밭이라는 것도 알았으니, 맛있게 김장을 담아 갖다 드리겠습니다. 잠시라도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는 것은 더욱 용기 있고 아름다운 일이지 않을까. 잃어버린 댁이나 가져간 댁이나 올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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