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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비빔밥 / 이유진

비빔밥 / 이유진 

 

 

 

겨울인지 봄인지 해가 갈수록 계절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새순들이 쏙쏙 올라오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 나온다는 경칩이 지났는데도 또 폭설이 내렸다. 겨울에도 눈이 흔치않은 지역이라 춘삼월에 때 아닌 설원이 반갑기도 하고, 파릇파릇 올라오던 새순들이 눈 속에 파묻히고, 꼿꼿한 오죽들이 눈에 짓눌려 휘청휘청 늘어져 누운 모양이 안쓰럽고 황당하기도 하다.

눈을 치우느라 땀을 내고, 떡 한 조각에 우유로 아침을 때워서인지 점심시간 전인데 시장기가 돈다. 나가봐야 마땅한 봄 찬거리가 없으니 장을 본지도 오래다. 어제 먹다 남은 밥과 나물 무침을 팬에 넣고, 참치 한 캔에 묵은 김치를 총총 썰고 돌김을 구워 싹싹 비벼 넣었다.

자작자작 데워질 때까지 간 보느라 반을 먹고, 드디어 김치볶음밥이 되었다. 비빔밥에다가 다시 볶음밥에 눌어붙은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니 점점 배가 불러오며 식곤증이 돈다. 마땅한 찬이 없을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먹다 남은 음식을 섞어 쓱쓱 비벼 먹는 것이 역시 최고다.

비빔밥은 지방마다 특별한 나물들이 있어서 각 지방마다의 독특한 맛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중 전주비빔밥과 진주비빔밥이 가장 유명하다. 식지 않은 고슬고슬한 흰밥에 고기로는 볶은 쇠고기나 육회가 얹히며 고사리·콩나물·시금치 등 거의 모든 종류의 나물을 데치거나 익혀서 함께 얹는다. 그 위에 튀각을 부숴 넣고, 고명으로는 달걀 지단 등을 얹고, 따로 볶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얹는다. 그리고 된장국이나 동치미 등 계절에 맞는 장국을 곁들인다. 최근에는 잘 식지 않는 곱돌그릇에 담아 뜨거운 채로 비벼서 먹는 돌솥비빔밥이 많은 인기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비빔밥은 여러 재료가 한데 섞이면서 맛도 상승효과를 낸다.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음식도 거부감 없이 먹게 되므로 골고루 영양섭취를 할 수 있어서 좋다.

비빔밥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것들이 한데 뒤섞이며 상승효과를 내는 것은 얼마든지 많다. 그중 제일은 사람과 사람들끼리의 어우러짐이 아닐까?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 밉지도 곱지도 않은 것,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것 등등…. 미지근하다거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선이 분명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지만 그편이 오히려 실수를 줄여주고, 여유를 갖게 하며 사람을 점잖게도 만들어 준다.

자기 입안의 혀도 물릴 때가 있다는 속담처럼 갖가지 성격과 개성,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은 가히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좋은 개성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자신과는 다른 남의 성격이나 생각, 남이 가진 특성과 개성을 이해하고 존중 해주며 자기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은 미덕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 편견이나 독선, 아집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며, 남을 헤아리고 배려하며 함께 어우를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세상의 어느 것도 혼자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잘나고 못난 사람, 유능하고 무능한 사람, 재주가 많거나 적은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비범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것이 세상이다.

많은 것을 고루 갖춘 완벽한 사람이 자신을 과시하며 독특하게 유명세를 누리며 잘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부족한 것을 함께 나누고 채워주며 더불어 상승효과를 낸다는 것은 멋진 사람을 더 값지게 만들어 준다.

세상과 집단에 겉돌지 않고 잘 섞인다는 것, 각기 다른 성격의 특성과 개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혼자서는 이루기 어려운 무언가를 함께 이룬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많은 일 중에 그 무엇보다 흐뭇하고 보람된 즐거움이 아닐까?

비벼 먹는 것은 질색이라는 한 친구는 학창시절 도시락을 모아 통째 털어 넣고 함께 고추장에 비벼 먹은 적도 없고, 유명한 전주비빔밥 집도 한번 가지 않았단다. 피치 못할 모임의 호텔뷔페에서도 수 차례씩 걸음을 할망정 같은 접시에 여러 음식을 섞어 담지 않는다. 이것저것 뒤섞어 놓으면 바가지로 얻어먹는 밥 같아 싫단다. 서화를 하고, 연극을 하고, 시낭송을 하는 예술인이라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을 가졌으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주변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 누구든 함께 있는 동안 내내 웃게 만든다.

식은 밥에 남은 찬을 넣어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비벼먹고 식곤증에 걸려있는 지금 내 꼴을 본다면 또 어떤 말로 웃게 만들까? 삼월에 때 아닌 폭설, 봄물 오르는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핀 저 눈꽃을 함께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