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 신은순
냉장고 센서가 무시로 깜빡거린다. 알맹이도 없는 엄마 젖가슴이 센서를 눌러 작동을 멈추게 했건만, 정작 당신은 모르고 계셨다. 가로가 더 넓은 김치 냉장고는 당초부터 타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한 곳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말이 다가오면 당신은 곳간 채우기에 바쁘고 자식들은 시간이 남아야 다녀간다.
주인을 기다리던 과일들이 냉장고 속에서 진액을 토해 내고 있다. 싱싱한 과일 하나 선뜻 드시지 않는 당신을 생각하니 목이 멘다. 신물단물 다 빠져 버린 파일과 쪼그라진 엄마를 번갈아 본다. 언제 뭉그러질지 모르는 껍질들이다. 질펀한 냉장고 바닥을 바가지로 박박 긁어 하수구로 쏟아냈다. 한때 풋풋했던 살점이 거름망을 빠져나가고 있다. 왜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냐고 큰소리로 과일을 다그쳤다.
막혔던 냉기가 시원하게 흐른다. 엄마는 냉장고 스위치에 손 댄 적이 없다며 제조회사를 못마땅해 여기신다. 사용법을 다시 설명한들 무뎌진 감각이 되살아날 리 만무다. 냉장고를 들여놓을 시기만 해도 엄마는 목단꽃처럼 환했다. 한 시절 치맛바람깨나 날렸고 우리는 그 치마폭에 싸여 기고만장했었다. 적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때 사모님이라 불리던 우리엄마가 싱싱한 것들을 품었던 냉장고 모서리만 어루만지신다.
멀쩡한 음식을 버리면 죄 받는다고 안절부절 못하시는 엄마 앞을 지나 닭장으로 향했다. 닭들이 앞 다투어 달려온다. ‘닭대가리’라는 것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아직도 나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친정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챙겨서 횅하니 돌아온다. 퍼내기만 했던 당신 가슴을 채우는 것들은 사소한 것인데, 알면서 행하지 못하니 먹이만 보고 달려오는 저 닭들과 무엇이 다르랴.
욕구 충족을 위해 주둥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닭들을 내려다본다. 분간없이 먹이만 쪼아대는 줄 알았는데 그 곳에도 포용이 있다. 더러는 자리를 양보하고 더러는 먹잇감을 두고도 모르는 척 비켜가기도 한다. 미물들을 바라보며 동기간을 생각한다. 살갑게 대하지 못했기에 애틋하다. 동기간이라는 것이 비빌 언덕이 되기도 하지만 관계가 느슨해지면 남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그동안 내가 친정 일에 등한시 했으니 할 말이 없다.
요즘은 엄마 역사 속에 격 없이 드나들며 속엣 말을 듣는다. 당신은 세월에 대한 한탄과 회한으로, 설움의 역사를 거슬러 이야기하시기를 좋아하신다. 부모 속 다 태워 살아온 내가, 그 작아진 영혼 하나 편히 쉴 만한 그늘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빈 냉장고를 덩그러니 세워두고 돌아서는데 당신이 기력을 다해 웃는다. 작은 바람에도 떨리는 저 문풍지 같은 육신 아무렇게나 빗어 올린 푸석한 머리카락 위로 노을이 번진다. 그 앞에서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작은 육신 하나 기우뚱거리며 백미러 속으로 들어와 손을 흔든다. 아무리 성화를 무려도 내 차가 동구 밖으로 나서기 전에는 빠져나가지 않을 영혼이다. 나는 그저, 백미러에 갇힌 초라한 노구를 힐끔거리며 엑셀레이드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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