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 장은경
봄이 오고 있다. 앙상한 가지가 봄비에 조금씩 흔들거린다. 자세히 보니 봄비 크기만 한 새순과 꽃망울이 그 가지에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지를 흔드는 것이 봄비인가, 아니면 스치는 바람인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쩌면 겨우내 언 땅에서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 온 뿌리가 땅 위로 생명수를 끌어올리며 흔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관과 체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고 딱딱한 가지를 뚫고 아기 속살 같은 새순이 봄비만 하게 돋아난 것이리라.
봄이 두 뺨을 스치고 손짓한다. 지난겨울 추위로 움츠리고 칼바람으로 마비되었던 우리네의 일상도 이제 긴 동면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일 해야지, 봄이 오면 해야지 하고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끄집어내고 보니 한 보따리다. 집 안에 쌓인 먼지, 두꺼운 겨울 이불, 드라이해야 하는 옷가지들, 활기를 잃은 베란다의 화분들이 주인을 다그친다. 이제 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봄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드디어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한다. 먼저 앞 베란다에 어질러 놓은 잡동사니 물건과 고장 난 우산, 철지난 장난감 등을 재활용하고 일반 쓰레기봉투에 담는 것으로 청소는 시작된다. 쌓인 먼지만큼이나 나 자신도 나태하게 내버려 두었으리라 고무장갑 속에는 어느새 땀이 흥건하다. 한참을 정리하고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다 보니, 주산 너머로 해가 숨으려고 한다. 넓어진 앞 베란다에서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다 못 하면 내일 다시 하면 된다.
봄이 앞 베란다에 놓아 둔 화분에도 오나 보다. 작고 앙증맞은 화초들도 겨우내 시들한 잎들을 떨궈 내고 연푸른 초록색 잎을 수줍게 내민다. 난 생긴 것과는 달리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아마 내 안에 작고 어여쁜 것에 대한 갈망이 내제되어 있어서 그러하리라. 단단해진 흙더미를 모종삽으로 살살 긁어본다. 물뿌리개로 물을 주자, 부드럽게 스미는 물소리가 꼭 자식 입에 맛난 음식 들어갈 때처럼 흐뭇해져 온다.
봄을 맞이하고 싶어 햇살 가득한 날을 잡아, 겨우내 덮었던 이불과 커튼을 빨아서 베란다에 반듯하게 펴서 널어둔다. 아마 오후 늦게는 뽀송뽀송해진 잘 마른 이불을 덮으면 남편과 아이들도 봄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리라. 봄의 생동감과 강인한 생명력을 덮고 자다 보면 우리 가족도 건강해지겠지.
봄기운을 부엌에도 가져오고 싶어 냉장고 위의 묵은 먼지를 닦는다. 씽크대도 화이트 톤에 예쁜 꽃무늬가 들어가는 시트지로 도배를 한다. 한 짝씩 분리해서 닦고, 시트 지를 바르고 다시 끼우기를 여러 날 하고 나자 부엌에도 봄기운이 완연해진다. 씽크대 안의 그릇과 잡다한 물건은 왜 그리도 많은지. 가끔은 내가 한 물건들이 생소할 때도 있다. 정리를 해야 다음에 무엇을 살지 버려야 할지 알 수가 있다. 사두고도 잊고 지낸 그릇과 주방용품들을 보며 미안해진다.
봄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청소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마지막으로 남은 시트지로 칙칙하고 손때 묻은 신발장도 도배를 한다. 신발장 안에는 부쩍 자란 아들들이 신었던 운동화, 슬리퍼, 실내화, 뒤축이 닳은 구두들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재활용에 보낼 신발을 분리하고 나머지는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이제 신발장 안에는 신을 수 있는 신발만 남고 빈자리마저 생긴다. 진작 정리 좀 하고 살 것을 뭘 하느라 이 모양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들춰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낡은 양말에 물을 묻혀 신발장과 현관의 흙먼지를 깨끗이 닦아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상쾌해지고 가벼워진다.
봄은 일상의 먼지와 찌듦을 헤치고 우리를 조금씩 좌우로 흔들며 새순의 작은 몸부림과 함께 다가온다. 맑게 갠 하늘 위로 새순은 더 크게 자라고 울창해져서 꽃을 피울 것이다. 움츠려 있고 게을러져 있던 내 마음에도 어느새 봄기운이 파고든다. 봄맞이 집 안 청소를 하며, 내 안에 존재하는 무한한 잠재력을 나무의 뿌리처럼 힘차게 끌어올려 새롭게 뻗어 나가고 울창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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