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가리 뿔 / 윤명희
“아버지, 말대가리에 뿔이 언제 나요?” 동생은 심심한지 기억속의 말대가리 뿔을 끄집어낸다. “소도 아니고 말대가리에 뿔이 왜 나누?” 칠순이 지나자 아버진 잊어버렸나보다. 동생은 다시 말대가리 뿔을 되씹어 아버지 기억 속에 집어넣는다. 삼십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우리 사남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열 두어 살 무렵, 집 근처에 은행이 생겼다. 4층 건물의 은행은 바깥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은행 업무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웠기에 알고 있지만 직접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쁜 언니들의 사근한 인사말이 듣기 좋아 몇 번 들락거리다 무작정 통장을 만들었다. 용돈이라고는 씨가 마른 때라 저금 할 돈을 갖기는 더 힘들었다. 만화방 가기위해 꿍쳐 둔 돈을 저금하고 어쩌다 생기는 돈을 들고 은행으로 가곤 했다. 하지만 내 돈만으로 통장에 숫자를 찍기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나는 작은 은행을 만들었다. 내가 은행장이 되고 고객이라고는 동생 셋이 전부였다. 공책을 찢어 은행을 흉내 내어 만들어준 통장에 금액을 적어 주었다. 나를 믿으라는 듯이 도장도 콱 찍어 주었다.
사금 채취하는 어린애들의 손바닥을 검사 하듯이 동생들에게 돈이 들어올라치면 감언이설로 꼬여 코 묻은 돈을 뺏다시피 했다. 나는 그 돈을 들고 은행으로 뛰었다. 통장에 숫자가 조금씩 올랐다. 이자가 붙었다. 공돈을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매일 매일 통장을 동생들에게 보여주며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며 행복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으게 되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판에 우리의 통장이 눈에 뜨인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돈에 아버지는 높은 이자를 약속했다. 우리는 높은 이자에 눈이 멀어 그 동안 애써 모은 돈을 홀라당 바치고 말았다.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더니 아버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도 말이 없었다.
“아버지, 우리 돈 주세요” 사흘이 멀다 하고 우리는 빛쟁이 재촉하듯이 졸랐다.
눈만 뜨면 졸라대는 우리에게 핑계가 궁해진 아버지는 말대가리에 뿔나면 준다고 했다. 소도 아니고 말 대가리에 왜 뿔이 나느냐고 했지만 살다보면 말대가리에 뿔이 나는 일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 돈은 말대가리 뿔에 갇혀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말대가리 뿔을 잊지 않고 끄집어낸다. 절대 안 준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면서 단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대가리에 뿔나기만 기다릴 뿐이라고 한다. 머리가 두개인 짐승이 태어나고 엉뚱한 색깔의 짐승도 태어나는 기형적인 시절에 왜 말대가리에는 뿔이 나지 않느냐며 투덜거린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나도 나만의 말대가리 뿔을 가지고 있다. 명절이면 불룩해지는 아이들의 주머니를 가만히 둘리 없다. 나는 나중에 준다면서 해마다 거둬들인다. 아이들이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나이가 되자 거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이라는 말대가리 뿔을 가진 나는 아이들의 돈을 꿀꺽 삼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중이 언제냐고 할 때마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한다. 그 나중은 항상 눈앞에서 서너 걸음 떨어져 있어 손이 닿지 않는다. 아버지처럼 절대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닿는 나중에 준다는 것이다.
나중이라는 말에 지쳤는지 거의 포기 한 듯한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이 된 우리 사남매는 아직도 말대가리 뿔을 찾고 있다.
기억 저 너머 있는 일들을 아버지 앞에 가져다 놓고는 콩이야 팥이야 따지는 동생을 나도 옆에서 거든다. 아버지는 짐짓 기억 못하는 척 헛기침을 내 뱉는다.
아직은 아버지의 기억력이 맑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으며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춘다.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던 날의 얘기를 들으며 잠시나마 세월을 거슬러 그 때 그 자리에 가 있다. 눈가에 그때의 웃음이 머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종이 위에 말대가리에 뿔을 그려 넣을지도 모른다. 그 위에 원금이나마 올려놓으리라 믿는다. 말대가리 뿔을 기억 할 만큼 돌아가실 때까지 기억을 놓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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