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다 / 임은주
어제 남은 찬밥 한 덩어리 꺼내 놓고 식탁에 앉았다. 찌개 하나만 달랑 놓고 먹는 식탁이 처량해 보이기는 하나 마음마저 서글프진 않다. 그저 전자레인지에 돌리다가 혼자 먹는 점심 한 끼의 생(生)이 요란한 것 같아 그냥 먹을 참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칠순이 넘은 J선생님이 “마당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혼자 보기는 아깝고 자랑할 데가 없네!” 하신다.
선생님의 꽃밭이 식탁 위에 찬밥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 놀러가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찬밥 한 덩어리에 꽃이 피었다.
오후에 홍시 한 상자를 들고 선생님 댁에 꽃구경을 갔다. 대문을 열어 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꽃이 핀다. 반가우셨나 보다. 마당은 넓고 깊었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의 이름과 심은 사연을 일일이 일러 주시는 선생님의 이야기꽃이 꽃망울 터지듯 열린다.
어느 봄날, 친정아버님께서 생신이 시월인 선생님을 위해 시월에 꽃이 피는 은목서 나무를 들고 오셔서 심었다고 하셨다. ‘은목서’ 누가 지었을까? 소설 속에 나오는 이름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에 쏙 든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매실차를 내어 오셨다. 내어 온 찻잔에 선생님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생각이 잠시 마음 곁에 머문다. 찻잔을 들고 제피나무 앞에 서셨다.
시장 장터에 다녀오시다 산 밑 동네에서 잠시 쉬던 중에, 선생님 댁에 없는 제피나무가 탐이 나셨단다. 그 집에 얻으러 들어갔는데, 주인은 없고 집안 아줌마가 뽑아 가라고 해서 주인 몰래 훔쳐왔다는 이야기를 하실 땐 영락없는 소녀 같으시다.
어느 해에는, 어린 배나무를 심어 놓고 꽃이 피면 옛 친구에게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보내리라 다짐하기도 하셨다고 했다. 또 집의 자랑인 살구나무가 죽어 그 자리에 찔레꽃이 눈부시게 피어난 이야기를 하실 땐 입에서 찔레꽃 향기가 솔솔 흐른다. 백양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사뭇 진지하다.
사계가 뚜렷한 나무이며 흰 명주를 몸에 감고 있는 것 같은 깨끗한 줄기며 봄날의눈부신 풋잎들, 여름날의 순결한 그늘과 가을 잎의 표표함. 봄, 여름, 가을의 찬란한 때가 지나고 나면 백양나무는 거느리고 있던 잎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고 외롭고엄격한 겨울나무가 된다는 말씀에,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도 열심히 살았다면 미련 없이 툴툴 털어내야 할 텐데, 저 백양나무처럼.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꽃밭을 가꾼다. 물론 보여주기 위한 삶은 아니다. 스스로 열심히 살아온 내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 한 번쯤 칭찬 듣고 싶다. 또 누군가에게 ‘나 열심히 살았어.’ 자랑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 때 누군가 지나가는 이가 꽃밭이 아름답다고 말 한마디 건넨다면 훨씬 힘이 나고 재미가 있지 않을까. 인생도 연극이다. 봐 주는 이 하나 없다면, 그 무대는 쓸쓸하고 심심하다는 건 외롭다는 뜻일 게다. 선생님도 외로우셨던 것일까?
선생님의 꽃밭도, 초라한 내 밥상도 가끔은 단 한 사람이라도 관객이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화려한 밥상을 차릴 순 없지만, 가끔 자신을 위해서 화려한 밥상을 차려도 좋으리라.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우리가 가끔 타인의 꽃밭에 관객이 되어주면 어떨까?
초라한 밥상에 꽃이 피는 이유가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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