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 강호형
항상 즐겁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즐겁게 사는 일이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요즘처럼 슬픈 일, 화나는 일이 많은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성격에 따라서는 그런 일을 당해도 쉽게 넘겨버리고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자신의 행복은 지킬지 몰라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강간 현장을 목격하고도 못본 체한다거나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 앞에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낙천주의자로 찬양받을 리가 없다. 하기야 지탄을 받는 것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다면 그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만은 확실하게 챙긴 사람이다.
말을 하다 보니 켕기는 데가 있다. 나 자신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물론 나도 크게 불행한 사람은 아니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선뜻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심리적 갈등 때문이다.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즐겁지 않으니 행복할 수도 없다. 내 논에 물 끌어들이는 심보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갈등을 겪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요즘 전철 대신 버스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전철을 타더라도 출입문을 가려서 탄다. 전동차 안에는 칸마다 네 귀퉁이에 노약자 보호석이란 것이 있는데 그 근처를 피하기 위해서다. 나는 아직 경로 우대를 받을 나이가 아닐 뿐더러 등산을 다닐 만큼 다리 힘도 있다. 그런데도 노약자석에 관심을 두는 데는 까닭이 있다.
어느 날 전동차에 올라 보니 마침 노약자석 앞이었다. 으레 그렇듯이 그날도 그 자리는 젊은 녀석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잠시 언짢은 기분만 달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사정이 좀 달랐다. 젊은 녀석들이 앉아 있는 바로 앞 통로 바닥에는 시골풍의 꼬부랑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할머니의 남편인 듯한 노인이 불안한 자세로 서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분명 주객이 뒤바뀐 형국이다. 멀끔하게 차려 입은 녀석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 줄 아는 녀석들이라면 하다못해 조는 척이라도 해야 옳다. 그런데 조는 척은커녕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손짓 발짓 다해 가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꼴을 보고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을 구가해도 좋을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도 감정을 자제하고 점잖게 타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높은 인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나는 그런 소질, 그런 인격을 갖추지 못한 위인인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가슴이 뛰고 피는 역류했다. 전동차가 한 정거장을 가는 시간은 2~3분이다. 나는 채 두 정거장을 참아내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야, 너희들 일어서!”
내 목소리 떨리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중 두 녀석이 용수철 튀듯 일어서 준 것이었다. 노인 내외를 앉히고 나니 아직도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나머지 한 녀석이 더 괘씸했다. 기왕에 내친 김이었다.
“너도 일어서!”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녀석이 힐끗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기는 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요지부동인 것이다. 차내의 시선들이 이미 내게로 화살처럼 쏟아져오고 있으니,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어서, 임마.”
나는 기어이 녀석의 어깻죽지를 잡아챘다. 녀석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자존심이 적잖이 상했던지 성난 황소눈을 하면서도 미적미적 일어서기는 했다. 이제는 볼 것 없이 내가 앉았다. 아무 관심없이 무한정 점잖기만 하던 차내의 방관자들에게 그만한 구경거리를 제공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하여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몇 정거장인지를 더 지나 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리자, 내 옆 철주에 기대 섰던 예의 그 녀석이 불시에 내 머리통에 일격을 가하고는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혀 껄껄 웃고 말았다.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자니 즐거울 리가 없다. 그렇다고 못본 체하기는 더 괴롭다.
즐겁지 않은 일이 그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왕따’라는 해괴한 행태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단으로 따돌리는 징벌이 요즘 비롯된 풍속은 아니다. 인륜에 벗어나는 일을 하면 마을에서 쫓아내는 불문율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요즘의 ‘왕따’는 징벌이 아니라 린치라는 데 문제가 있다. 너의 고통이 우리의 즐거움이라는 이 가공할 가학(苛虐) 취미!
우리의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숱한 석학 대현들의 기막힌 진단과 처방이 속속 내려지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일소가 될 줄로 믿거니와, 어리석은 견해를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어른들의 ‘왕따’ 행태부터 고쳐나가야 하리라는 것이다.
힘없는 늙은이가 앉을자리를 젊은이가 차지하는 것이 왕따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늙은이도 왕따다. 장관·국회의원·대통령 등은 나이에 상한선을 두지 않으면서 전문직 교원들은 환갑만 지나면 폐기 처분하려는 것이 왕따다. 버려진 아이, 소외된 장애인,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노숙하고 있는 지난날의 역군들 모두가 왕따의 희생자들이다. 권력이나 이권의 향배에 따라 철새처럼 당적을 옮겨 다니는 정치가들의 행태도 다 왕따다. 어른들은 이처럼 왕따하면서 아이들만 못하게 한다면 그것도 왕따라고 대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전화 한 통화에 일천 원씩 부과되는 ARS 이웃돕기 성금이 600억 원이나 모였으며, 남의 목숨을 구하다가 물에, 불에, 흉기에, 열차에, 희생되어간 의로운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크나큰 감동이요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인정’마저 완전히 왕따당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서글픈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왕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이승에서의 퇴출… 아무도 막아줄 수도 대신 해줄 수도 없는 죽음. 왕따라면 이 한 번만으로도 너무나 가슴 아픈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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